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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대한민국 최초의 선거 "5.10 총선거"
  • 작성자 운영자 등록일 2016-07-13

 

"신생독립국 대한민국의 꿈, 5.10 총선거"

 

해방이 왔다. 그러나 진정한 해방은 아니었다. 일제의 압박에서는 벗어났으나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갈라졌고 그 남과 북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했다. 한때 어깨를 맞대고 독일, 일본과 싸웠던 미국과 소련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세계 각지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한반도는 그 최대의 각축장 중 하나였다. 남과 북의 두 나라 군정(軍政)은 자신의 기호에 맞는 정부를 한반도에 세우기 위해 각을 세웠고 행정상 경계선일 뿐이었던 38선은 국경선처럼 높고도 굳어졌다. 단일한 언어와 문화를 고수해 온 한 민족이 분단의 위기에 놓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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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남북 어느 곳에 살아도 같은 ‘조선인’이었던 당시의 사람들은 실제로 분단에 직면하리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현실은 그들의 기대를 배신했다. 이미 해방 다음 해부터 조짐은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 한 예가 미국과 소련의 미소(美蘇)공동위원회가 성과 없이 끝난 직후였던 1946년 6월 유력한 정치 지도자 이승만이 터뜨린 유명한 ‘정읍 발언’이다. “이제 무기 휴회된 (미소)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았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며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입네다.”

 

이후 전개되는 역사적 과정에 대한 통찰로 보는 의견에서부터 분단 고착화의 시작이라는 비판까지 이 ‘정읍 발언’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존재하지만 남북의 독자적 정치 체제 구축의 흐름은 그 말에서 처음 드러난 것이 아니다. 공개된 구 소련 자료에 따르면 1945년 9월 20일, 일본이 항복하고 소련군이 북한을 장악한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에 이미 스탈린은 휘하에 이런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북조선에 부르조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

 

이후 벌어진 좌우익간의 극한적인 유혈 대립 속에서 통일된 독립 국가의 꿈은 점점 엷어졌고 남북 공히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힘을 얻어갔다. 미국 군정 장관 하지 중장의 중재로 중도파 김규식과 이승만이 마주했을 때의 일화를 보면 이것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김규식이 “조국의 분단이 결정되는 이때에 우리가 최후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역사는 우리를 역적으로 규탄할 것”이라고 호소한 데 대해 이승만은 “내가 역사에 대한 책임을 질 터이니 염려 말라”고 맞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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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 출처 : 위키백과]

 

소련과의 협의가 무산된 이후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UN으로 가져갔고 여기서도 미국과 소련이 대립한 끝에 UN은 호주, 캐나다, 중화민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시리아 등 9개국 대표로 구성된 'UN한국임시위원단'을 발족시켰다. UN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총선을 치른 후 정부가 수립되면 외국군을 철수하기로 한다는 미국의 안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위원단은 1948년 초 방한했지만 소련 군정 당국은 그들의 북한 입국을 거부했다. 그러자 동년 2월 UN소총회는 공산권이 불참한 소총회는 UN한국임시위원단으로 하여금 “선거 실시가 가능한 남한 지역에서라도” 선거를 실시하고 이를 감독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드디어 1948년 3월 17일 미군정 법령으로 국회의원선거법이 공포된다. 5월 10일(첫 발표에서는 9일이었음) 선거를 선포하고 만21세 이상의 모든 국민에게 선거권을 주는 보통선거, 1인 1표를 행사하는 평등선거, 그리고 비밀·직접 선거라는 민주주의 선거 원칙이 적용됐고 피선거권은 만25세 이상의 국민에게 부여됐지만 일제강점기의 일본 제국의 작위를 받았거나 일제 때 관료들 중 일부에게는 피선거권이 제한됐다. ‘국회선거위원회’ 법령의 마지막 단락에는 당시 사람들이 이 선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명백히 드러낸다.

 

“이번 총선거가 유사 이래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전 국민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기권하는 선거인 없이 전 유권자가 투표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역사적인 선거임에는 분명했으나 그 선거를 치르기까지는 기나긴, 그리고 긴장된 두 달이 남아 있었다.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단독 선거를 반대하는 세력들의 봉기가 터져 나왔고 김구를 비롯한 단독정부 반대 세력과 좌파는 선거 참여를 거부했다. 김구는 선거가 한창 준비 중이던 4월 19일,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에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라고 하면서 방북을 강행하기도 했다. 이 모든 어수선함 속에서도 1948년 5월 10일은 점점 다가왔다.

 

수십 개의 정당들은 다투어 입후보를 세웠고 경쟁률은 평균 5대1에 육박했다. 이렇다 할 선거운동 제한 규정이 없었지만 ‘공무원은 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고 못 박았기에 정치 일선에서 일찌감치 뛰어다니고 있던 동네 반장들은 대거 사퇴했다. 북한의 선거 불참에 맞서 성공적인 선거를 끌어내야 했던 미 군정청도 기민하게 움직였다. “이미 1947년 6월 홍보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본국으로부터 홍보전문가들을 초빙하여 주한미군 산하에 특별기구(공보원)를 설치했다. 선거포스터와 팸플릿, 공중살포용 전단과 신문, 주간지 그리고 영화와 라디오 방송 등 당시 활용 가능한 모든 미디어를 동원하여 5월 10일 실시될 역사적인 첫 번째 선거를 알렸다. 모든 콘텐트는 ‘투표를 어떻게 하는가’라는 주제에 집중됐다.” (중앙일보 2013. 5. 20. “198명 제헌의원 뽑은 역사상 첫 민주 선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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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정청의 독려와 첫 선거에 대한 기대감 등으로 분위기는 달아올랐지만 일부 세력들의 선거 방해 공작도 극성이었고 이에 맞서 보다 많은 유권자들의 투표를 끌어내 선거의 정당성을 높이려는 움직임도 강력해졌다. 4.3 봉기가 진행 중이던 제주도는 말할 것도 없고 선거 당일에도 수류탄 테러 등이 일어나 전국에서 18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유권자 등록률은 95퍼센트에 달했고 그들은 1948년 5월 10일 오전 7시에서 오후 7시까지 전국 1만3,272개 투표소에서 역사적인 투표권을 행사한다. 투표율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95.5%였다. 그 결과 198명의 제헌국회의원들이 당선됐고 이들이 5월 31일 소집돼 당시 헌법으로 국회에서 뽑게 돼 있던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하면서 대한민국의 이름은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물론 5.10 선거는 북한을 배제한 단독 선거라는 한계와 좌익의 방해 공작과 미숙한 운영 등으로 흠결을 남긴 선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이 선거의 역사적인 의미는 지대하다할 수 있다. 수 천년 봉건 군주 체제 하의 신민이었고 제국주의 치하의 피압박민족이었던 조선인들이 자신의 참정권을 공식적으로 행사한 첫 선거로서 5.10 선거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출발점이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모태였던 것이다. 그 감회를 당시의 신문 기사를 찾아 다시 한 번 읽어 보자.

 

“민족 천년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장엄한 새벽이 밝으니 단기 4281년의 5월 10일! 흐리던 날이 맑게 갠 이 날이 아침 일곱시부터 세계의 커다란 주목을 받으며 남조선 1만 3천여 투표소에서는 이 나라의 자주독립정부를 수립할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민주주의적 투표가 애국동포들의 줄기찬 열성으로 경건하게 시작됐다.... 진실로 구렁텅이에 빠졌던 조선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앞으로 한 걸음씩 올리게 하는 큰 힘이 될 것이니 이 세기적 사업에 비치는 광명은 더 한층 찬란한 것이다.” 글자 그대로 5.10은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는 첫발이었고, 20세기 우리 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날 중의 하나였다.

 

- 필진 : 김형민 PD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 전공인 국사와 세계사를 틈틈히 공부해 SNS와 블로그에 '산하의 오역'이란 제목으로 역사관련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렇게 모은 글을 엮어 '그들이 살았던 오늘'의 제목으로 책을 냈다. 현재 sbscnbc에서 PD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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