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역사] 대한민국 대선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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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선을 통해 시대상을 알아보는 그 마지막 시간입니다. 11대 대통령선거를 시작으로 각 대선을 통해 선거제도는 물론 현대사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15대, 16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과 선거제도의 변화과정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공명이와 함께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로 가보실까요?
1997년 12월 18일에 실시된 제15대 대통령선거는 14대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실시되었습니다. 15대 대통령선거 1년 전에 치러진 1996년의 제15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신한국당은 야당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당선자에 대해 무차별 영입교섭을 벌였고, 이에 따라 제 15대 국회는 ‘여소야대’에서 ‘여대야소’로 재편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아래서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은 공동으로 장외투쟁을 벌여, 15대 국회는 제15대 국회의원 임기 개시 이후 2개월여 동안 개원이 지연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사진 1 : 15대 국회의 모습)
여기에 1996년 12월말 신한국당의 노동법 개정안 기습처리로 정국은 다시 한번 급속하게 경색되었고,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은 노동관계법 원천무효를 주장하며 재심의를 촉구하였습니다. 노동계마저 전국규모의 총파업을 실시함으로써 노동법 재개정 합의로 수습되는 듯 하던 정국은 뒤이어 터진 한보그룹 특혜대출 비리사건과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씨의 비리사건이 불거져 나오면서 안개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특히나 이 두 사건으로 정경유착과 정치부패 구조가 분명하게 드러나면서 민심은 흉흉해 졌고, 경기침체 또한 더욱 심화되어 대농, 기아, 진로그룹 등 대기업의 도산사태가 이어지게 됩니다.
(사진 2 :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요청 발표)
제15대 대통령 선거 1년 전부터 시작된 대규모 경제악화는 1997년에 들어와서도 지속되었고, 국내기업들의 부도와 금융시스템 불안, 여기에 동남아 지역의 외환위기 여파로 국내 금융기관들이 신용위기로 치달으면서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경제살리기’가 주요한 쟁점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언론과 시민단체의 정치개혁 요구도 거세졌습니다.
(사진 3 : 검찰에 출두중인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
특히나 한보그룹의 총수인 정태수 회장이 주력사업인 한보철강이 자금난에 봉착하자 은행 대출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정치권에 거액의 뇌물을 제공한 권력형 금융부정과 특혜대출비리사건을 벌임으로써, 위와 같은 정치개혁 요구에 더욱 힘을 싣게 됩니다. 이에 정치권은 ‘정치자금에 관한 법률’개정협상을 벌여 관련법률을 대폭 개정하였습니다. 또한 여야 간 정치자금의 형평성문제와 음성적인 정치자금의 조달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지정기탁금제를 폐지하였고, 음성적인 정치자금수수에 대한 처벌규정도 신설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후원회의 연간기부한도액을 상향조정하고, 후원회를 통한 정치자금의 조달이 용이하도록 개정되었습니다.
(사진 4 : DJP(김대중-김종필) 연합)
정당 별 후보결정과정을 살펴보면, 15대 대통령선거에서도 예전부터 이어져온 지역주의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야권 측의‘DJP연합(김대중-김종필)’은 ‘호남, 충청, 대구, 경북’을 한데 묶어 한나라당을 압박할 의도로 성립된 지역연합의 한 형태로 김대중 총재를 단일후보로 내세우고, 김종필 총재는 차기 국무총리를 맡는 것을 약속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권 측에서도 신한국당 대통령후보 경선대회 직후 이회창 후보의 지지도가 높은 지지율을 보이던 도중 두 아들의 병역면제 의혹이 제기(훗날 사법부에서는 병역면제에 문제가 없다고 최종판결 하였습니다)되면서부터 지지도가 하락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이인제 경기지사가 당의 개혁을 요구한 뒤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 후 독자출마 쪽으로 방향을 정하여 분열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사진 5 : 국민신당의 창설)
결국 이회창 총재의 신한국당은 야권에서 제3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민주당과의 합당을 통해 한나라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대선레이스에 최종적으로 합세하게 됩니다. 신한국당 이회창 총재와 민주당 조순 총재의 당 대 당 통합을 통한 한나라당의 창당 또한 다른 후보들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선거의 승리를 겨냥해서 통합된 정당이라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사진 6 : 한나라당의 출범)
제 15대 대통령선거는 1994년에 새로 제정된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에 의거해 새로 제정된 선거법을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새로 개정된 선거법은 주로 고비용 정치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소형인쇄물 종수를 축소하고 현수막 개시매수를 줄였으며, 정당과 후보자 연설회를 옥내로 한정하면서 개최횟수도 대폭 줄인 특징이 있습니다. 또한 방송매체를 이용한 선거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방송광고와 방송연설, 경력방송 횟수를 증편하고 공영방송사 대담, 토론회를 신설하였으며 언론기관 토론회의 대담기간을 연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선거공영제를 확대하여 선거인쇄물제작비용, 현수막 제작 및 게시비용, 신문 및 방송광고비용, 방송연설 비용, 선거사무원 수당은 기탁금 반환 요건을 충족한 경우 국가가 보전하도록 하여 후보자의 부담을 경감시켰습니다.
구분 | 제14대 대통령선거 | 제15대 대통령선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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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선거권(거주요건) | - 40세 이상의 국민 | - 선거일 기준 5년 이상 국내 거주요건 추가 |
기탁금액 | - 3억원 | - 5억원 |
선전벽보 첩부기준 | - 읍?동은 인구 500만?면은 인구 200인에 1매 비율로 첩부 | - 읍은 250인, 면은 100인, 동은 500인에 1매 비율로 첩부 |
소형인쇄물 종수?배부 | - 책자형 3종, 전단형 1종 - 정당 또는 후보자가 배부 |
- 책자형, 전단형, 명함형 각 1종 - 선거관리위원회가 우편발송 |
신문광고 횟수 | - 각 일간신무에 각 4회 | - 70회 이내(정치 자금모금 광고 가능) |
정당?후보자연설회 장소?횟수 | - 개표구별 5회 이내에서 개최 - 집회장소는 옥내 및 옥외 가능 |
- 시?도마다 2회, 구?시?군마다 1회 - 집회장소를 옥내로 한정 |
공영방송사 TV토론회 | - 규정없음 | - 공영방송사 텔레비젼 대담?토론회 규정을 신설하고 선거기간 개시일 전 10일까지 대통령선거방송토론위원회를 설치 |
방송연설 횟수 | - 후보자와 연설원이 각각 TV?라디오 방송별로 각 5회 이내 |
- 후보자와 연설원이 각각 TV?라디오 방송별로 각 11회 이내 |
방송광고 횟수 | - TV?라디오방송별로 각 5회 이내 | - TV?라디오방송별로 각 30회 이내 |
후보자 경력방송 횟수 | - 방송시설을 경영하는 자가 3회 이상 | - 한국방송공사가 TV?라디오별 각 8회 이상 |
단체의 대담?토론 | - 규정없음 | - 선거운동기간 중에는 횟수 제한없음 - 선거기간 전에는 개최불가 |
언론기관 대담?토론 | - 선거운동기간 중 TV?라디오방송별로 각 3회 이내 | - 선걱운동기간 중에는 횟수 제한없음 - 선거일 전 120일부터 선거기간 개시일 전일까지 대담기간을 연장 |
선거비용 보전 대상 | - 방송연설 비용 중 일부 (후보자가 행산 각 3회, 연설원이 행한 각 2회) |
- 신문광고의 70회 비용 |
투표용지 적국통일 기호 | - 규정없음 | - 국회교섭단체 구성 정당의 추천후보자는 전국적 통일된 기호 부여 |
선거범죄 조사권 | - 규정없음 | - 선거범죄 조사권 도입 |
선거방송심의위원회 | - 규정없음 | - 선거기간 개시일 전 10일까지 방송위원회에 설치 |
반론보도청구권 | - 규정없음 | - 선거보도 반론보도 청구권 신설 |
선거운동에 있어서 특히 15대 대통령선거는 텔레비전 방송을 이용한 대담 및 토론회를 3회 이상 의무적으로 개최하도록 규정함으로써, 대통령선거 역사상 첫 후보자 합동토론회를 개최한 의미 있는 선거입니다. 선거방송토론위원회가 1997년 11월 20일부터 정식 활동에 들어감으로써 대담 및 토론회의 초청대상 후보자 기준을 ‘국회 교섭단체를 구성한 정당의 후보자’와 ‘최근 여론조사에서 10%이상 지지를 얻은 후보자’로 정해 초청대상자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 3명으로 한정되어 3회 실시되었습니다. 다만 다른 정당의 반발을 고려하여 초청대상 기준에 미달한 후보자들만을 대상으로 1회의 대담 및 토론회를 개최하기로 하여 15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총 4회의 대담 및 토론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사진 8 : 제15대 대통령후보 합동토론회)
열띤 선거운동의 결과로 제15대 대통령선거는 80.7%라는 투표율을 기록했으며,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유효투표수 대비 40.3%의 표를 얻어 당선이 확정되었습니다. 2위인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는 1.6%의 근소한 표차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14대 김영삼 대통령의 5년 임기가 종료된 다음날인 1998년 2월 2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취임식을 갖고 제 15대 대통령의 직무를 시작하였습니다.
(사진 9 : 김대중대통령이 당선증을 펼쳐 보이고 있는 사진)
제15대 대통령 선거는 헌정사상 최초의 여, 야 간 정권교체를 이뤄낸 선거였지만 지역주의 현상이 여전히 남아있었던 선거였습니다. 또한 미디어 선거운동의 본격화를 알리는 선거로써 미디어 매체를 이용한 선거운동이 당선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선거이기도 했습니다.
‘국민의 정부’라고 불렸던 제 15대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2002년에는 제 16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2002년 12월 19일 치러진 제 16대 대통령 선거는 21C로 넘어오면서 각종 미디어의 영향력이 더욱더 커졌고, 2002 한-일 월드컵, 효순-미선 장갑차사건, 제 2차 연평해전 등 대선 전에 중요한 정치적 상황들이 존재하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사진 10 : 새천년민주당 대통령선거 후보 국민경선)
특히나 제 16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새천년민주당이 대통령 후보 선출과정에 국민경선제를 도입함으로써 많은 화제를 낳았습니다. 새천년민주당은 2002년 3월 9일부터 제주를 시작으로 전국 16개 시도를 순회하며 당원(50%), 국민(50%)들이 직접 투표하는 방식을 도입하여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였습니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유력 대선후보는 이인제 후보였고, 이외에도 김근태, 정동영, 한화갑, 노무현 등 기성 정치인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습니다. 국민경선제를 통하여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는 인상적인 연설을 통해 기존의 예측을 뒤엎고 세 몰이에 성공함으로써 이른바 ‘노풍’의 주인공이 되어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되었습니다.
(사진 11 : 새천년민주당 대통령선거 후보자 노무현)
또한 한나라당도 2002년 4월 13일부터 국민참여경선을 통하여 이회창 후보를 최종 대통령선거 후보로 선출했습니다. 직전 대통령선거 때부터 한나라당의 지도자였으며, 그가 가진 특유의 ‘대쪽’이미지, 경력, 신뢰감이 그가 대통령선거 후보자가 되는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사진 12 : 한나라당 대통령선거 후보자 이회창)
여기에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열풍을 타고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정몽준 의원까지 가세함으로써 16대 대통령선거는 많은 이슈를 낳았습니다. 월드컵 열기를 틈타 발생한 제2연평해전으로 인해 국가 안보를 중시하는 풍토와 효순-미선 장갑차 사건으로 인해 전 사회적으로 퍼진 반미감정이 교차하면서 각 정당 및 후보간 지지율이 여러 차례 반등하여 선거 직전까지 누구의 우세도 판단할 수 없는 양상을 보인 특징이 있습니다. 선거가 가까워져 올수록 범 보수를 대표하는 이회창 후보에 맞서기 위해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 요구가 거세게 일어났고, 대통령 선거 1달 전인 2002년 11월에 두 후보가 단일화를 위한 만남을 가졌습니다. 단일화 과정에서 국민경선, 여론조사, 담판 등 여러 방법을 놓고 결국 텔레비전 토론 이후 실시한 여론조사방식을 채택해 노무현 후보 최종 단일후보로 결정되었습니다.
(사진 13 : 노무현 – 정몽준 후보단일화)
후보단일화 이후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후보는 이회창 후보를 지지율에서 역전했으나, 이러한 분위기도 잠시, 이인제 의원이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한 후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고, 정몽준 후보마저도 대선 투표 전날인 2002년 12월 18일 저녁 10시 민주당과의 선거 공조를 파기함으로써 16대 대통령선거는 선거 당일 까지도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사진 14 : 광화문앞의 사람들 사진, 사진 15 : 합동토론회 사진)
제 16대 대통령선거의 특징으로는 선거운동이 기존의 정당 중심에서 후보자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특히나 21C로 넘어오면서 강화된 미디어가 선거에 대단한 영향을 끼친 점은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노무현 후보의 지지단체인 ‘노사모’라던가 인터넷을 이용한 선거운동의 조직화, 모바일 폰을 이용한 선거운동의 활성화,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한 촛불집회의 조직화 등은 기존의 선거행태를 새롭게 바꾸는데 크게 일조하였습니다. 그만큼 인쇄 매체 보다는 방송 광고와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한 선거운동이 두드러진 대통령 선거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사진 16 : 2002년 대선 노무현 이회창 지지율 챠트 하위 설명참조 )
제 16대 대통령선거 결과 70.8%의 투표율을 기록하였고,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2%의 근소한 차이로 이기고 당선되었습니다. 한나라당의 이회창, 민주당의 노무현,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하나로연합의 이한동, 호국당의 김길수 등 총 5명의 후보가 참여하였지만, 노무현과 이회창 후보를 제외한 나머지 후보들이 얻은 득표율은 유효투표의 5%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미미하였습니다.
제 16대 대통령선거에서도 여전히 지역주의적 특색이 나타나는 선거결과는 유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15대 대통령선거와 비교하여 호남지역과 영남지역에서 양당후보 사이의 득표율 격차가 줄어드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유권자들의 지역주의적 투표성향이 약화되어가는 경향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선거이기도 했습니다. 노무현 당선자는 2003년 2월 25일 제 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함으로써 ‘참여정부’를 표방한 임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사진 17 : 투표한 당신이 아름답습니다. - 투표하는 모습 사진)
이렇게 15대, 16대 대통령선거까지 모두 살펴보았는데요, 11대 대통령 선거부터 우리나라의 대선사(史)를 쭉 살펴보시니 어떠셨나요? 자세하게 소개해 드리지 못한 사건들도 너무 많았고, 사건의 중요함만큼 길게 설명하지 못한 일들도 많았던 것 같아 조금 아쉽네요. 하지만 공명이가 지금까지의 대선이야기를 통해 유권자 여러분들께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선거는 시대상을 늘 반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의 선거가 이루어 지기까지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수 많은 사건들과 선거 결과를 통해 생겨나는 또 다른 수 많은 사건들. 이것들이 모여 우리의 대표자를 결정하고, 우리의 역사를 만들어왔으니까요. 결국 역사를 만들어온 것은 우리의 행동이고, 우리의 투표였습니다. 올해 12월에 있는 18대 대통령선거에서 행하는 우리의 투표가 우리나라의 역사를 만드는 소중한 행동이라는거, 잊지 않으실거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명예기자
정다운(un2703@nate.com)
사진 및 내용출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대한민국선거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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