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대선의 역사를 통해 보는 근현대사, 그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기사에서는 11대와 12대 대통령의 선출과정을 조명해보았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선거란 역시 단순한 인물에 대한 투표가 아니라 시대상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시간이었죠. 격동의 80년대를 지나 민주화를 이룩하는 과정에서도 ‘선거’는 빠질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었죠. 이번 기사를 통해서는 13대와 14대 대통령의 선출과정과 그 배경을 알아볼까요?
제 13대 대통령선거는 제 12대 전두환 대통령의 7년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1987년 12월 16일 치러졌습니다. 특히나 제13대 대통령선거는 ‘대통령직선제’큰 정치적 격동기를 거친 후에 실시한 선거인 만큼,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12대 전두환 대통령이 대통령의 선출방법을 기존의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바꾸는 것에 반대하여 1987년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여 어수선한 정국이 계속되던 중,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축소 사건’이 밝혀지면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폭력성과 부도덕성에 국민들이 분노했고, 결국 대통령직선제와 민주화 등을 요구하는 ‘6월 민주항쟁’이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이를 통해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의 뜻을 받아들이고 대통령직선제를 받아들이는 ‘6·29선언’을 내놓았고, 1987년 10월 27일 헌법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한 결과 역대 국민투표 중 최고의 찬성률(93.1%)로 헌법개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제 13대 대통령선거는 국민들의 직접선거로 치를 수 있게 된 것이죠.
제 13대 대통령 선거는 이러한 상황 아래서 어느 때보다도 야당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 보였기 때문에 더욱 관심이 높은 선거였습니다. 이 당시에 유력한 야당 측의 후보 군에는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정치인들이 있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야당인사 탄압 속에서 정치적 협력관계를 맺어왔던 두 거물급의 인사는 6월 항쟁을 기점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이 사실화 되어가자 다시 경쟁관계로 접어드는 조짐을 보이게 됩니다. ‘통일민주당’의 총재인 김영삼과 상임고문인 김대중은 긴 시간에 걸쳐 후보단일화 문제를 논의하였으나, 결국 내부적인 많은 문제로 인해 후보단일화가 실패하게 되고, 1987년 10월 28일 김대중 고문이 기자회견을 갖고 신당창당을 공식선언함으로써 야권 측의 후보단일화는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어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민주공화당 총재를 역임했던 김종필 또한 1985년 정치활동 규제가 풀린 이후 귀국하여 1987년 10월 5일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게 됩니다. 정계복귀를 선언한 김종필의 신당창당으로 인해 정국은 급속히 경쟁 구도를 띄게 됩니다.
제 13대 대통령 선거는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 이후 16년 만에 실시하는 국민들의 직접선거이었으므로 대통령선거법 또한 새로 제정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13대 대통령선거에 적용할 대통령선거법은 제7대 대통령선거 때의 선거제도를 근간으로 하고, 시대변화상을 반영하여 만들었죠. 특히나 새로 제정된 대통령선거법은 대통령선거 사상 처음으로 ‘기탁금제도’를 도입하고, 연설회와 TV·라디오를 이용한 방송연설 및 대담·토론 등의 개최횟수를 늘리는 등 선거운동의 기회를 확대하였으며, 투표과정의 공정성 확보장치를 강화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표 8-1> 제12대와 제13대 대통령선거 주요제도 비교
구분 |
제12대 대통령선거 |
제13대 대통령선거 |
선거방법 |
대통령선거인에 의한 간접선거 |
국민의 직접선거 |
대통령의 임기 |
7년(중임불가) |
5년(중임불가) |
피선거권
(국내거주요건) |
선거일 현재 계속하여 5년 이상 국내 거주 |
제한없음(거주요건 삭제) |
후보자 추천 |
- 당원 : 소속 정당이 추천 - 무소속 : 대통령선거인 300인 이상 500인 이하의 추천 |
- 당원 : 소속 정당이 추천 - 무소속 : 선거권자 5,000명 이상 7,000명 이하의 추천 |
기탁금 |
(없음) |
- 정당추천 후보자 : 5천만원 - 무소속 후보자 : 1억원 |
선거운동방법 |
3가지 (선거공보, 신문광고, 방송연설) |
9가지(선전벽보, 방송연설, 방송대담/토론, 경력 방송, 신문광고, 연설회, 기호표, 표지판, 현수막) |
선거비용 |
국가에서 부담 |
정당 또는 후보자가 부담 |
투표용지 가인 |
(없음) |
- 구/시/군위원회 : 정당대리인 2명 가인 - 투표구위원회 : 제1당과 제2당 정당추천위원 2명 가인 |
투표통지표교부입회인 |
(없음) |
정당/후보자 등이 지명하는 1인 참여 |
군인 등의 부재자투표 방법 |
(규정없음) |
그 시설 안에 설치된 기표소에서 투표 |
당선인 결정방법 |
대통령선거인의 과반수를 얻은 후보자(과반수 특표자가 없을 때는 2차, 3차 결선 투표) |
유효투표의 다수를 얻은 후보자 |
특히나 처음 실시된 기탁금의 금액은 정당추천후보자는 5천만원, 무소속후보자는 1억 원으로 책정되어, 총 8명의 후보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납부한 기탁금은 총 4억 5천만 원 이었습니다. 기탁금은 선거결과 후보자의 득표수가 유효투표총수의 100분의 5를 초과하지 못하였거나, 후보자가 사퇴 혹은 등록무효가 된 경우에는 국고에 귀속하도록 선거법에 규정되어있었습니다. 민주화가 획기적으로 진척된 상황에서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을 수 밖에 없었던 시대상황에서 후보자의 난립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로서 기탁금 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된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표 8-3> 제13대 대통령선거 기탁금 반환 및 귀속상황
기탁금액 |
반환금액 |
국고귀속 |
비 고 |
450,000,000 |
200,000,000 |
250,000,000 |
- 반환(4명) :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 귀속(4명) : 홍숙자, 김선적, 신정일, 백기완 |
13대 대통령선거는 역대 어느 선거보다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치러졌고, 선거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도 높았기 때문에 선거 쟁점 또한 많았습니다. 주요 쟁점으로는 군정종식, 12·12사태의 성격공방, 안정과 혼란, 흑색선전, TV편파방송, KAL기 폭파사건, 관건선거 논란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에서는 이러한 선거상황 아래서 공명선거활동 목표를 “건전한 선거질서 확립을 통한 공명선거의 기반조성”과 “민주시민의식 양양을 통한 올바른 선택과 참여의식 확보”에 두고 언론매체, 인쇄물, 시설물 등을 이용하여 공명선거 활동을 펼쳤습니다.
(사진 1 : 제13대 대통령선거 포스터/표어)
(사진 2 : 제13대 대통령선거 선전벽보)
(사진 3 : 제13대 대통령선거 개표장면)
많은 상황아래서 펼쳐진 제 13대 대통령선거의 특징으로는 지역주의 투표성향, 역대 대통령선거중 최소득표율 당선, 당선인과 차점자 간의 큰 득표차, 외국 언론 등의 높은 관심, 낙선 후보자들의 선거결과 불복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표 8-21> 역대 직선제 대통령선거 당선인 득표율 ( 단위 : %)
구분 |
제2대 대선
(1952.8.5.) |
제3대 대선
(1956.5.15.) |
제4대 대선
(1960.3.15.) |
제5대 대선
(1963.10.15.) |
제6대 대선
(1967.5.3.) |
제7대 대선
(1971.4.27.) |
제13대 대선
(1987.12.16.) |
득표율 |
74.6 |
70.0 |
100.0 |
46.6 |
51.5 |
53.2 |
36.6 |
당선인 |
이승만 |
이승만 |
이승만 |
박정희 |
박정희 |
박정희 |
노태우 |
<표 8-21> 역대 직선제 대통령선거 당선인과 차점자의 득표차
구분 |
제2대 대선
(1952.8.5.) |
제3대 대선
(1956.5.15.) |
제4대 대선
(1960.3.15.) |
제5대 대선
(1963.10.15.) |
제6대 대선
(1967.5.3.) |
제7대 대선
(1971.4.27.) |
제13대 대선
(1987.12.16.) |
득표차 |
4,441,265 |
2,882,629 |
- |
156,026 |
1,162,125 |
946,928 |
1,945,157 |
비고 |
(당)이승만
(차)조봉암 |
(당)이승만
(차)조봉암 |
(당)이승만 |
(당)박정희
(차)윤보선 |
(당)박정희
(차)윤보선 |
(당)박정희
(차)김대중 |
(당)노태우
(차)김영삼 |
1987년 10월 29일 공포된 제6공화국 헌법의 부칙에는 이 헌법에 의한 최초의 대통령(제13대 대통령)의 임기는 이 헌법의 시행일로부터 개시한다고 규정하고 있었으므로, 시행일인 1988년 2월 25일이 제13대 대통령의 임기시작일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13대 대통령선거 당선자인 노태우 당선자가 1988년 2월 2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광장에서 각계 25,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취임식을 거행하고 5년 임기의 대통령 직무를 시작함으로써, 제 13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제14대 대통령선거는 노태우 제13대 대통령의 5년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1992년 12월 18일 실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대통령 선거를 약 4개월 앞두고 한준수 전 연기군수가 제14대 국회의원선거 때에 정부가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하였다고 폭로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관권선거에 대한 시비가 끊이지 않아 소란스러운 정국이 지속된 상태였습니다. 이를 마무리 하기 위해 헌정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집권여당의 당적을 포기하고 중립내각을 구성하였지만, 이후에도 ‘중립성 시비’는 끊이지 않고 제기되었습니다. 여당과 야당의 합의가 원활히 이루어 지지 못하여 국회의 구성이 늦어진데다가, 중립성의 시비마저 일어난 상황에서 제14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것입니다.
특히 제14대 대통령선거는 함께 숙명적 라이벌 관계였던 김영삼 민주자유당 총재와 김대중 민주당 대표가 각각 여당후보와 제1야당의 후보가 되어 맞대결을 펼치게 되어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여기에 우리나라 최대재벌 중에 하나인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까지 가세하면서 선거운동이 매우 치열한 선거였습니다. 특히나 제14대 대통령선거는 소형인쇄물, 정견•정책집, 방송광고, 표찰, 어깨띠 등이 처음 도입된 선거로써 선거운동방법이 매우 다양하고, 활발했던 선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표 6-1> 대통령선거제도 변경내용 비교
요 목 |
제13대 대통령선거 |
제14대 대통령선거 |
선거인명부 작성 기간 |
선거일 공고일로부터 7일 이내 |
선거일 공고일로부터 5일 이내 |
후보자 등록기간 |
8일간 |
8일간 |
기탁금 |
- 정당추천 후보자 : 5,000만 원 - 무소속 후보자 : 1억원 |
정당/무소속 구분 없이 3억원 |
선거운동기간 |
30일 |
28일 |
선거운동방법 |
9가지(선전벽보, 방송연설, 방송대담/ 토론, 경력방송, 신문광고, 연설회, 현수막, 기호표, 표지판) |
14가지(선전벽보, 정견/정책집, 소형인쇄물, 방송연설, 방송대담/토론, 경력방송, 신문광고, 방송광고, 연설회, 현수막, 기호표, 표지판, 표찰, 수기) |
선거운동원 일당/실비 |
일당과 실비 보상 |
실비만 보상(일당 지급불가) |
부재자투표소 |
규정없음 |
선거기간 중 10일간 설치 / 운영 |
선거범의 공소시효 |
선거일 후 3월(도피시 1년) |
선거일 후 6월(도피 시 3년) |
선거범의 재판기간 |
규정없음 |
제1심은 공소제기일로부터 6월이내, 제2심 및 제3심은 전심재판의 선고가 있는 날로부터 각각 3월 이내 |
선거소송 처리기간 |
1년 이내 |
180일 이내 |
(사진 6 : 제14대 대통령선거 선전벽보)
이러한 분위기 아래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제14대 대통령선거의 공명선거활동 목표를 ‘정책중심의 경쟁분위기 유도’와 ‘준법선거 풍토의 조성’으로 삼고 언론매체, 인쇄물, 시설물, 각종 행사 등을 이용하여 공명선거 활동을 펼쳤습니다.
(사진 7 : 제14대 대통령선거 포스터)
(사진 8, 9 : 좌측- 청사현판, 우측-"무인비행선에 선거법을 지킵시다")
제14대 대통령선거의 결과 특징으로는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 때에 표출된 지역주의 투표성향이 제 14대 대통령선거까지 이어졌고, 이전의 대통령 선거와는 달리 낙선한 후보자들이 선거결과에 승복하였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당시 통일국민당 김영삼 후보와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가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부정선거를 통해 당선되었다며 선거결과에 승복하지 않겠다고 밝혔었지만,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낙선한 민주당 김대중 후보와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가 바로 선거결과에 승복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사진 8 : 김영삼대통령의 선서하는 모습 사진)
제14대 대통령선거는 민주화 실시 이후 5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상태에서 실시된 안정된 선거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특히나 당선된 김영삼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부터 노태우 대통령까지 이어진 군인출신의 계보를 끊었다는 점에서 이른바 ‘문민정부’의 출범이라고 불리 우는 특징이 있습니다.
여러분, 제 13·14대 대통령선거를 통해 우리나라 근·현대의 흐름을 파악하시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나요? 사실 매우 다양하고, 큰 사건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시기라서 각각의 사건 하나가 갖는 의의가 너무 크다 보니 모든 사건을 다루면서 선거의 모습을 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거의 결과가 각 시대상을 반영하는 가장 확실한 징표이면서 변천의 모습을 보이는 선거법에 따라 지금 우리가 세계적으로 훌륭한 선거시스템을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투표가 미래세대에게는 크나큰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시면서, 모두들 다시 한번 우리의 권리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명예기자
정다운(un2703@nate.com)
사진출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대한민국선거사 5집, 6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