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역사] 대한민국 대선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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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정당들의 전당대회가 큰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요즘. 12월 대선을 앞두고 전당대회를 통해 전열을 정비하느라 분주한 모양새입니다.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이 여당(與黨)이라는 칭호를 얻고, 국정운영에 유리한 고지에 오르는 만큼, 긴박한 대선레이스의 시작에 앞서 조직의 세(勢)를 모으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겠죠?
( 사진 1 : 역대 대통령과 재임기간 )(17대 이명박 재임 2008 ~ 현재, 16대 노무현 재임 2003 ~ 2008, 15대 김대중 재임 1998 ~ 2003, 14대 김영삼 재임 1993~1998, 13대 노태우 재임 1988~1993, 11~12대 전두환 재임 1980~1988, 10대 최규하 재임 1979~1980, 5~9대 박정희 재임 1963~1979, 4대 윤보선 재임 1960~1962, 1~3대 이승만 재임 1948~1960)
일국의 지도자가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후보자의 능력은 물론, 수많은 변수들을 극복한 사람들이 당선되곤 했습니다. 1948년 7월 20일 간접선거형태로 치러진 제 1대 대통령선거부터 시작된 대한민국 대선사(史)를 면밀히 살펴보면,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 혹은 선거제도, 각 대선주자들의 이합집산에 의해 역사가 많이 바뀌어 왔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명이는 12월 19일에 실시되는 제 18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우리나라의 대선사를 살펴보면서 정치적 상황의 변화와 선거제도의 변화를 통해 미래의 지도자를 선출하는데 좀 더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다룰 시기는 격동의 80년대입니다. 80년대로 들어오면서 1980년 8월 27일, 제 11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제 11대 대통령선거는 제 10대 최규하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재임 8개월만인 1980년 8월 1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남에 따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 10대 대통령선거는 1979년 12월 6일에 치러졌지만, 약 9개월 만에 대통령 선거가 다시 실행된 만큼 11대 대통령 선거 이전에는 정치적 격변기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진 2 : (좌측부터) ‘12•12 군사반란’, ‘서울의 봄’, ‘5·18 민주화 운동’)
제 11대 대통령선거가 실행되기 전에는 ‘12·12 군사반란’, ‘서울의 봄’, ‘5·18 민주화 운동’이 연쇄적으로 발생했었죠. 특히나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유신체제가 붕괴되고, 사회 전반에 걸쳐 민주화 열망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던 당시 일어난 12·12군사반란은 우리나라의 현대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정치적 대 사건이었습니다.
사건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인 10·26사태에 장승화 계엄사령관이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를 씌워 대통령의 사전재가를 받지 않고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불법으로 장승화 사령관을 연행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휘계통을 밟지 않은 점이 문제가 되고 많은 반대에 부딪히자 그는 자신의 지휘권 아래에 있는 군인들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지휘계통의 지휘관들을 체포하고, 군의 실직적인 지휘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중앙정보부장서리까지 겸임하면서 그의 영향력을 국정 전반으로 확대하였고, 사실상 국가권력을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 군부의 정치권 장악은 10·26 사태 이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국에 불어 닥친 민주화 요구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됩니다. 이미 시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항거했던 정치인사 및 재야인사들에 대한 특별 사면 및 복권조치가 실시되면서 억압되었던 민주화가 회복될 것으로 기대되었고 이 시기를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80년 5월 1일 서울대학교 총학생회를 필두로 신군부의 정치개입이 민주화에 큰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계엄령 즉각 해제’, ‘전두환 퇴진’ 등의 구호를 내걸면서 가두시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전국으로 확대되어 민주화의 열망을 가진 시민들과 이를 진압하려는 경찰이 충동하여 유혈사태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와 같이 1980년 서울의 봄은 정치권의 대결과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 노동자들의 농성·파업 등으로 일부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게 되어 정치에 개입할 구실과 시기를 찾고 있던 신군부세력에게 명분을 주게 되고,
결국 이것이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조치와 동시에 계엄포고 제10호를 발령한 신군부세력은 모든 정치활동과 정치목적의 집회•시위를 금지하고,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은 사전에 검열 받도록 했으며, 대학에 휴교 조치를 내리게 됩니다.
(사진 3, 4 :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발표된 다음날인 1980년 5월 18일 광주(光州)에서 이에 반대하는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민주화 운동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공수부대원들과 대학생들 간의 충돌로 시작되었고, 공수부대원들이 강제 해산과정에서 무차별 폭력을 휘두르게 되어 학생들의 시위는 광주시내 중심지로 더욱 커지게 됩니다.
광주에서의 시위가 정국 장악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신군부세력은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을 우려하여 언론보도를 통제하면서 광주시내에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강경진압을 시작했고, 이는 학생은 물론 시민이 계엄군과 도처에서 충돌하여 사태가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특히나 이 과정에서 공수부대가 시위군중에 발포를 하게 되면서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열흘간 벌어진 민주화 운동은 많은 희생자를 내고 군부의 진압으로 일단락 되었습니다.
제 11대 대통령선거가 이뤄지기 전에는 이렇게 굵직굵직한 중요 사건들이 많았고, 정국이 매우 불안정하던 시기였습니다. 게다가 신군부세력을 중심으로 한 전두환 대장(大將)의 정권장악으로 인해 새로운 대통령 선거법이 만들어 지지 못하고, 종전의 간접선거 방식으로 진행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선거를 관리하는 기관은 통일주체국민회의(유신헌법 제 39조, 통일주체국민회의법 제18조)이었고, 선거관리위원회는 대통령선거에는 일절 관여할 수 없는 체제였습니다. 후보자의 등록신청 또한 후보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 본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하도록 되어있었고, 정국을 장악한 전두환(전역 후 국보위상임위원장) 1명만 단독출마 하게 되었습니다. 변경되지 못한 선거법으로 인해 후보자의 등록이 매우 어려웠으며, 정권장악을 통해 유력한 정치적 라이벌인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을 이미 체포 혹은 가택연금 함으로써 손쉽게 당선될 수 있었습니다.
(사진 5 : 통일주체국민회의)
제 11대 대통령선거는 통일주체국민회의 제적대의원 과반수의 찬성을 얻은 자로 결정한다는 헌법규정에 따라 1980년 8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실시되었습니다. 제적대의원 2,540명 중 기권자 15명을 제외한 2,525명이 참여하여 99.4%의 투표율을 기록하였고, 무효 표 1표를 제외한 2,524표를 얻어 전두환 후보자는 다섯 번째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임기로는 11대 대통령)
제 11대 대통령 선거는 간접선거로 치러졌고, 당시 전두환 국보위상임위원장 말고는 누구도 대통령이 되기 위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별다른 특징이 없는 선거였습니다. 하지만 나름의 의미를 찾는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정치주체의 현실화로써 정치권력 공백기에 신군부세력이 배후에서 정치를 조정하다가 전두환 국보위상임위원장이 대통령이 됨으로써 정치주역으로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2) 과도기의 단축을 가져옴으로써 과도기적 정부를 빨리 종식시켰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국가의 운영주체가 명확해졌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뿐 그 과정이나 수단에 나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님을 밝혀둡니다.
(사진 6 : 제 11대 전두환 대통령 취임 (1980. 9. 1))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 전(前) 대통령은 취임 후 국민투표를 통해서 헌법을 개정하게 됩니다. 이 제5공화국 헌법에서는 11대 대통령의 당초 임기인 1984년 12월 26일까지를 무효화 하고 새로운 12대 대통령 선거를 1981년 6월 30일까지 실시하도록 규정하여, 11대 대통령에 취임한지 반년 남짓한 기간을 보내고, 1981년 2월 25일 제12대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됩니다.
12대 대통령 선거 이전에는 11대 대통령선거 이전 6개월 이라는 시간 동안 전두환 정권이 권력기반을 견고하게 구축한 정치적인 상황이 존재하였습니다. 특히 1980년 10월 22일 국민투표를 통하여 헌법을 개정함으로써 기존 정당과 국회를 자동 해산시키고, 국회의 기능은 국가보위입법회의를 설치하여 대행하게 하였습니다. 이후에는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기존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등 정국안정과 12대 대통령 취임을 위한 사전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진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진 7 : 국가보위입법회의 법사위의 모습(1980. 11. 1))
당시 존재했던 민주공화당, 신민당, 민주통일당, 통일사회당 등은 개정 헌법 시행과 동시에 자동 해산 되었고, 이와 마찬가지로 국회 또한 마찬가지로 해산되었습니다. 특히나 이 과정에서 개정된 헌법은 11대 대통령의 임기는 개정헌법에 의한 최초의 대통령이 선출될 때 종료되고, 10대 국회의원의 임기는 새로운 국회가 구성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제 5공화국 헌법 시행과 동시에 임기를 종료 시켰다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단체의 설립을 통해 국회의 기능을 대신하게 한 전두환 대통령은 법률안 및 예산안, 결산안 등 중요 안건을 처리하게 하였고, 전두환 정권의 통치편의 내지는 통치를 합리화 하거나 그들의 집권기반을 견고히 하는 방향으로 법률을 만들었습니다. 기존 정당과 제10대 국회를 해산하고, 기성정치인의 정치활동을 금지하여 정치권의 정지작업을 마무리한 전두환 정권은 반대세력의 이합집산을 위한 다당화 전략을 펼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후 정당활동을 허용하고 새로운 정당들의 창당을 허락하게 되면서 민주정의당,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등 총 9개의 정당이 생겨나게 됩니다.
(사진 8 : 새로운 정당들의 창당)
이러한 배경위에서 실시 된 제12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제 5공화국 헌법에 의해 대통령선거가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바뀌었고, 통일주체국민회의의 폐지에 의해 새로운 대통령선거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제정된 선거법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한 간접선거에서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명칭만 바뀌었을 뿐, 사실상 크게 유신헌법의 제도와 큰 차이는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하지만 대통령선거인단을 뽑는 선거에서는 기존에 어려움이 많았던 선거운동 부분에서는 선전벽보, 선거공보, 합동연설회의 3가지 방법으로 가능케 하였고, 선거운동에 소요되는 비용은 후보자에게 부담시키지 않고 모두 국고에서 부담하도록 하여 완전한 선거공영제를 실시한 측면도 존재합니다.(법 제53조)
(사진 9, 10 : (좌) 대통령선거인단 선거 선전벽보, (우) 대통령 선거인선거 합동연설회 모습)
제12대 대통령 선거의 실시에 있어서는 민주정의당 전두환 후보, 민주한국당 유치송 후보, 한국국민당 김종철 후보, 민권당 김의택 후보가 후보자 등록을 하여 경쟁하게 되었습니다. 후보자의 기호추첨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주재 하에 실시되었고, 각각의 결과에 따라 기호를 배정받아 선거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전두환 후보의 당선가능성이 100% 가까울 정도로 구색 맞추기 식 상대후보가 아니냐는 말들도 많이 제기 되었지만, 유신체제를 거치면서 오랜 기간 단일 후보를 선택해왔던 선거 방식과는 다른 형태의 선거였다는 측면도 존재합니다.
(사진 11 : 제12대 대통령선거 선거공보)
그렇지만 신군부의 12•12 군사반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 헌법 개정, 언론통폐합, 정당 및 국회해산, 정치인들의 활동금지 등 선거 쟁점 사안이 매우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부가 이를 금기시하였으므로 이런 일들이 선거쟁점이 될 수 없었다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결국 전두환 후보는 총 선거인 5,270명의 유효투표중 4,755표의 득표를 얻어 90.2%의 지지율로 제 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게 됩니다. 특히나 유력정치인들의 정치활동 금지와 언론을 동원한 전두환 후보의 리더십 부각은 유권자들에게 크게 작용했다는 점에서 최근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많은 표현의 자유와 또한 그것을 지키기 위한 움직임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역사학자 E. H. Carr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라고 말했습니다. 1980년대의 혼란스러운 정치적 배경이 낳은 선거결과의 과오가 오히려 지금 우리나라가 선진화된 선거관리 시스템을 갖게 해주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렇게 변화되어 온 모습의 중심에는 언제나 유권자들, 즉 국민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다는 것이겠죠? 최근 SNS시대의 도래로 인해 많은 정보가 공유되고, 표현의 자유도 보장되었지만 정작 그 열기만큼 실제적인 투표율로 나타나고 있지는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80년대 대선사(史)를 통해 지금 시대의 유권자들이 취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 봤으면 좋겠어요. 다음에는 13대 대통령 선거부터 시작되는 대선 이야기를 들고 찾아올게요 기대해주세요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명예기자
정다운(un2703@nate.com)
사진출처)
1) www.naver.com
3) www.mhj21.com (문화저널21)
2, 4~8)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대한민국선거사4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