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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15 부정선거
  • 작성자 운영자 등록일 2016-07-14

 

"우리가 배운 민주주의는 이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후세 사람들에게 가장 즐겨 인용되는 선거는 어떤 선거일까. 1948년 5월 10일의 제헌국회의원선거도 있고 16년만에 직선제로 치러진 1987년 대통령선거도 있고 역사적 흐름을 바꿨다 할 1985년 2.12 총선도 있겠으나 툭하면 호명(呼名)되고 뻔질나게 불려 나오는 선거는 따로 있다. 그리고 그 선거는 유감스럽게도 기념할 만한 선거가 아니다. 오히려 억지로라도 잊어버리고 싶은 대한민국의 흑역사요 기념비적인(?) 부정선거였다. 바로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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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두산백과사전 / 3.15의 거탑]

 

1963년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하는 대통령선거에서부터 “3.15를 능가하는 부정선거”(友洋 허정)라는 날선 비판이 나왔고, 1967년 6?8 총선 때 민주당 대변인이였던 김대중은 “3.15 부정선거를 무색케 한다.”고 목청을 돋웠으며, 1971년 대통령선거 때도 똑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심지어 1987년의 대통령선거에서도 ‘3.15 부정선거’에 빗댄 주장이 격렬히 제기됐고 그 뒤도 여러 번이다. 대체 3.15 선거는 어떤 선거였을까?

 

1960년 당시 대통령선거는 관례적으로 5월에 실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의 유력한 대항마인 야당의 조병옥 후보가 신병 치료차 미국에 가 있던 1960년 2월 3일, 정부는 별안간 선거를 3월 15일로 두 달이나 앞당겨 치르기로 결정한다. 농번기를 피한다는 명분이었는데 과거 두 차례의 대통령선거가 모두 농번기에 치러졌음을 감안하면 도무지 말이 안되는 핑계였다. ‘정히 농번기를 피하자면 7월로 미루면 어떠냐’는 문제 제기에도 정부는 귀를 막았다. 요는 야당 후보에게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당으로서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오는 사건이 발생한다. 야당 후보 조병옥이 미국에서 수술을 받던 중 급서한 것이다. 즉 이승만 대통령이 단독 출마한 상황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 박사(이승만 대통령)가 운이 좋기도 하다.”고 탄식을 했지만 사람의 욕심은 항상 행운 그 이상을 바라는 법이다. 여당에게 중요한 것은 이제 대통령이 아니라 부통령이었다. 대통령 나이가 여든이니 당장 취임식 다음날 사망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고 그를 승계할 사람은 부통령이었다. 그런데 지난 선거에서 여당은 야당에게 부통령을 내 주었다. 자유당 정부로서는 이는 절대로 되풀이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이 지상과제의 선봉에 선 이는 당시 내무부장관 최인규였다. 장관 취임식에서 “모든 공무원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며, 차기 정.부통령선거에서는 기필코 자유당 후보가 당선되도록 해야 한다.”고 공언을 했던 이 어이없는 장관은 선거가 다가오면서 더욱 바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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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백과 / 대한민국 제 1, 2, 3 대 대통령 이승만]

 

59년 11월 하순부터 60년 2월 하순까지 전국의 시장,군수와 경찰 간부들을 매일 열 명 내지 스무 명씩 불러 부정선거 요령을 교육시킨 것이다. “비합법적인 비상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선생을 꼭 당선시켜야 한다. 법은 나중이니 우선 당선시키고 나중에 책임은 내가 진다. 국가대업 수행을 위해 무조건 지시하는 대로 하라.”는 것이 그의 강변이었다. 내무부장관이 진두지휘한 부정선거 방식은 실로 다양했다.

 

4할의 표를 미리 선거함에 집어넣는 사전투입은 기본이었다. 이는 당일의 자연스런 기권표와 선거인명부상의 유령들, 매수된 기권표 등을 합쳐 4할의 표를 미리 ‘만들어’ 둔 것이었다. 또 3인조?9인조 공개투표도 있었다. 3인조, 9인조 팀을 만들어서 그 조장이 조원의 기표상황을 확인하고 그 기표용지를 자유당 측 선거원에게 제시한 후에 투표함에 넣는 행위로 비밀선거의 원칙을 애초부터 뭉갠 것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완장부대를 동원해서 개표장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야당 참관인을 매수하기도 했고 이도저도 안되면 개표장에 정전을 시켜 버린 후 통째로 투표함을 바꾸는 ‘올빼미식’과 야당 후보에 기표한 투표용지에 인주를 묻혀 무효로 만들어 버리는 ‘피아노식’ 등 별의 별 부정선거 방식이 고안됐다. 전국 시.읍.면.동 단위로 만들어진 ‘공무원 친목회’는 월 1회 이상 모여 ‘득표공작’에 대한 특별 교육을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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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마침내 3월 15일 선거일이 왔고 ‘연습한 대로’ 온갖 방식의 부정선거가 선거판을 뒤덮었다. 어느 지역구에서는 인구보다 더 많은 투표수가 쏟아지는 기이한 일도 벌어졌고 야당 부통령 후보 장면은 1표, 여당 후보 이기붕은 수만 표라는 희한한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으며 이건 너무했다 싶은 내무부는 여당의 이승만 대통령 후보 득표율을 94퍼센트에서 90퍼센트로, 이기붕 부통령 후보 특표율을 92퍼센트에서 84퍼센트로 자체 하향 조정(내무부장관 최인규의 공소장)하기까지 했다.

 

아연실색한 민주당은 오후 4시 30분 공식적으로 선거 무효 선언을 하지만 그 시발은 그보다 6시간 먼저, 남도의 항구 도시 마산에서 일어났다. 사전투입으로 투표권 자체를 박탈당한 유권자들이 아우성을 치는 가운데 민주당 마산시당 위원장 조규남은 선거 무효를 선언했고 3시간 뒤 경남도당이 그 뒤를 따르고 전국으로 급전을 날린 것이다. 그러나 이 날은 추악한 부정선거의 날이기도 했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역사에 다시 세운 날이기도 했다. “정.부통령 선거, 다시 하라!”는 외침 속에 학생과 시민들은 분노의 시위에 나섰고 경찰은 이를 저지하다가 실탄 사격을 퍼붓는다. 그날 쓰러져 간 사람들만 12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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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 / 수송 초등학교 학생들의 시위와 경무대 앞 시위]

 

네 살에 개가해 버린 어머니의 집에서 나와 거리에서 생활하며 구두닦이로 열심히 살아가던 나이 스물의 오성원, 구공탄 장수 아버지를 도와 리어카를 밀면서 야간 중학교라도 가겠다며 밝게 웃던 김영호, 홀어머니 밑에서 근근히 고학하며 마산고등학교 졸업장을 거머쥔 지 며칠 안 된 김영준, 중학교 졸업 후 무능력한 아버지를 대신해 가방을 버리고 기계를 잡았던 전의규 등등. 그들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이라 할 소중한 투표권을 빼앗길 수 없다며 부정선거에 항의하다 죽어간 것이다. 사실상 ‘대한민국’이라는 민주 공화국은 그들의 죽음 위에 다시 세워진 것이나 진배가 없다. 한 달 뒤 4.19 시위로 쫓겨날 이승만 대통령이 말한 바, “불의를 보고도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었기에 그들은 죽어서 살았고, 그들의 나라를 살렸다.

 

그 의미를 21세기에 되새기기란 쉽지 않으나, 우리는 사뭇 간단하게 하나의 참담한 반면교사를 접한다. 며칠 전 3월 11일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제13기 대의원선거 결과에 대한 발표를 했다. "전국적으로 선거자명부에 등록된 전체 선거자의 99.97%가 선거에 참가해 해당 선거구에 등록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후보자에게 100% 찬성 투표했다"는 것이었다. 이 터무니없는 선거 결과에 실소하지 않을 이 없거니와, 1960년 3월 15일 우리는 비슷한 환경 아래 있었고 그 부당함에 떨쳐 일어서고 죽어간 이들 덕에 선거의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기억해 두는 것이 좋겠다. 3.15 부정선거라는 사상 초유의 부정 선거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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