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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발자취를 찾아서] 신분제타파와 평등을 향한 고려 천민들의 염원과 투쟁

작성자 : 슈퍼관리자 등록일 : 2017-08-04

 

어느 국사 교과서에는 몽골의 고려 침략기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집권자인 최우는 몽고의 무리한 조공 요구와 간섭에 반발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장기 항전을 위한 방비를 강화하였다. 이에 몽고가 다시 침입해 왔으나 처인성(경기 용인)에서 장수 살리타가 김윤후에게 사살되자 퇴각하고 말았다. 이후 고려는 여러 차례의 몽고 침략을 끈질기게 막아냈다. 강화도의 고려 정부는 주민들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키고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하였다.”

 

 

[민주주의의 발자취를 찾아서] 신분제타파와 평등을 향한 고려 천민들의 염원과 투쟁 관련이미지1  
출처 : 드마라 무신(mbc)의 살라타이(좌)와 김윤후(우)


 

그러나 이 서술은 여러 면에서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단 최우는 ‘항전’을 위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게 아니라 최씨 정권의 유지를 위해 강화도에 들어앉았던 것이었다. 즉 몽골과 싸우기 위해서 강화도라는 요새로 옮긴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기득권만을 지키기 위한 비겁한 도피였다.

 

그러면서 최씨 정권은 사실상 본토의 방위를 포기하다시피 했다. “주민들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켰다고 하지만 정부가 치밀한 준비와 계획을 거쳐 이쪽의 모든 자원을 탈탈 털어 방어 진지로 옮긴, 즉 청야전술을 구사한 것이 아니라 그냥 “알아서 산성으로 가든가 섬으로 가라.”는 ‘각자도생’의 방치였다.

1253년 몽골군은 5차 침입을 감행해 온다. 몽골의 공격 루트는 두 방향이었다. 서북 지역을 휩쓸고 내려오는 종래의 경로 외에 동북면으로  남하하여 강원도, 경기도 내륙 지방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이윽고 몽골군은 오늘날 중부 내륙 고속도로 노선을 따라 남하하는데 몽골군에 저항했던 강원도 춘천, 철원의 최후를 들은 양평과 천룡 (충북 중원)의 백성과 군사들은 저항을 포기한다. 몽골제국의 군대는 이들을 화살받이 삼아 앞장세우고 의기양양 남하한다. 그들의 다음 목적지는 충주였다.

 

 

[민주주의의 발자취를 찾아서] 신분제타파와 평등을 향한 고려 천민들의 염원과 투쟁 관련이미지2 

출처 : 충주성


 

충주성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사연이 얽혀 있었다. 20년 전 몽골의 1차 침입 때 충주성은 몽골의 공격을 받았다. 이때 양반들은 다 도망가고 노비와 평민들만이 남아서 몽골군을 물리치는데 도망갔던 양반들이 돌아와서는 은그릇 없어졌다고 기껏 몽골군을 물리친 노비들을 도둑으로 몰아붙이는 통에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고 결국 정부군에게 진압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몽골군에게 쓴맛을 안긴 곳이면서도 고려 상류층의 ‘모럴 해저드’를 적나라하게 보여 줬던 지역인 셈이다.

이번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양반들은 일찌감치 보따리 싸서 남한강을 타고 영월 정선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거나 새재 넘어 경상도로 피해 버렸다. 남은 건 또 오갈 데 없는 노비와 천민들 중심의 민병뿐이었다. 그러나 그 지휘관은 매우 특별한 인물이었다. 바로 20년 전 오늘날의 경기도 용인의 처인성에서 몽골 침략군 사령관 살리타이를 활로 쏘아 죽였던 김윤후가 충주에 와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의 발자취를 찾아서] 신분제타파와 평등을 향한 고려 천민들의 염원과 투쟁 관련이미지3 
출처 : 강화도 석수문

승려 출신인 그는 양반들보다는 오히려 천민들과 잘 통하는 사람이었다. 살리타이가 죽임을 당한 처인성은 원래 처인부곡이라는 천민들의 주거지였고 성이라고 한들 오늘날의 축구장보다도 좁은 토성이었다.

 

김윤후는 그 좁은 성에서 천민들을 이끌고 농성을 준비하다가 살리타이라는 대어를 낚았던 것이다. 몽골군은 살리타이 사후 갈팡질팡 오락가락 면모를 보이면서 황망히 철수했다. 거의 김윤후 혼자서 몽골군을 무찌른 셈이었다. 그런데 김윤후는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져서 상과 벼슬을 내리려는 조정에 대고 이렇게 말한다.
 
“제가 아닙니다. 저는 살리타이를 죽일 때 활을 든 적도 없습니다. 어떻게 공이 없는데 상을 받겠습니까.”

이는 김윤후의 겸손한 성품을 말해 주기도 하지만 그가 공을 돌리고 싶은 대상이 따로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대상은 바로 처인부곡의 천민들이었다. 조정에 의해 천민들의 집단 거주지역이었던 처인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된다. 즉 천민들이 면천하여 양민이 된 것이다.

 

“오늘부로 처인부곡의 처인현임과 부곡 천민들의 면천을 선언하노라.” 아마 처인부곡이 생긴 이래 가장 큰 잔치가 벌어졌을 것이다. 김윤후는 양민의 지위를 받아든 부곡민들이 얼마나 미친 듯이 기뻐하는지, 얼마나 그 신분의 딱지에 한이 맺혔는지를 절실하게 이해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러 그는 충주성의 방호별감이 됐고 또 한 번 천민들을 이끌고 몽골군의 대군과 맞서게 됐다.

 


 

[민주주의의 발자취를 찾아서] 신분제타파와 평등을 향한 고려 천민들의 염원과 투쟁 관련이미지4 

출처 : goo.gl/kQpyat

 


이미 충주는 고립된 성이었다. 심지어 경상도 성주의 유력자가 소백산맥을 넘어 몽골군에 투항하고 있으니 이미 충주 주변은 몽골군의 세력권이었다고 봐야 했다. 1253년 10월, 몽골군이 충주산성을 포위하고 사다리를 성벽에 걸치면서 70일에 걸친 공방전이 시작된다.

 

정규군은커녕 천민 일색의 고려군이었지만 몽골군이 혀를 내두를 만큼 악착같이 싸운다. 하지만 식량의 부족과 기나긴 싸움은 점차 고려군의 힘을 소진시켰다. 몽골군이 성벽에 올라서는 일이 잦아졌고 화살과 돌도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에서도 충주성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끝’이라는 글자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이때 김윤후가 내린 특단의 조치.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어느 날 김윤후는 성 안의 천민과 노비들을 불러 모은다. 굶주리고 기진맥진한 천민들은 김윤후 앞에 서 있지도 못하고 철퍼덕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러나 김윤후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뭔가를 잔뜩 들고 나왔을 때 천민들, 특히 노비들의 눈은 커졌다. 그것은 노비 문서를 비롯한 부곡민들의 천한 신분을 증명하는 서류들이었다. 이마를 두르는 천형처럼, 발목을 잡아챈 족쇄처럼 자신들의 부모와 자신과 자신들의 자식의 이름과 인생을 결박한 문서.



충주전투  
출처 : 위키백과

 


김윤후는 외친다. “똑똑히 보아라. 이 노비문서가 어떻게 되는가를. 너희는 오늘부로 양민이다. 이 성을 지킨 뒤 문하시중도 되고 병마사도 될 수 있는 양민!” 그리고 노비문서에는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김윤후는 20년 전 처인성에서 그 에너지를 보았었다. 운명에 귀속된 인간들이 그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어떤 힘을 내고 어떤 힘을 얻는가를 기억하고 있었다. 날름거리며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노비 문서가 스러지는 것을 본 노비들은 함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악을 쓰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앞에서 물구나무를 하고 춤을 추고 데굴데굴 굴렀다.



김윤후 장군 동상 
출처 : http://www.traveli.co.kr/festival/contentsView/2135/1


신분의 굴레에서 해방된 인간들의 힘은 끝내 대제국 몽골의 공격을 물리친다. 김윤후가 천민들에게 제공한 건 신분의 해방이면서 곧 그들이 싸워야 하는 이유였다.

 

인간사에서 벌어지는 모든 갈등이나 전투, 그리고 경쟁에서 승리의 가장 큰 원동력은 왜 싸워야 하는지의 이유를 확실히 아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드리운 불평등과 억압을 철폐하고 보다 나은 삶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의지를 ‘자유’라고 한다면 자유는 인류 역사에서 인간이 모든 것을 걸고 떨쳐 일어서게 만들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그 어느 위협이나 공포보다도, 억압과 명령 앞에서보다도 인간은 자유를 목전에 둘 때 가장 용감해진다. 그리고 그를 위해 싸울 때 가장 존엄해진다. 세계제국 몽골에 맞선 충주성 전투가 우리에게 남기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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