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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민주주의] 고구려의 마그나카르타 '봉상왕 폐위'

작성자 : 슈퍼관리자 등록일 : 2017-07-04

 

고구려의 마그나카르타 '봉상왕 폐위'

 

 

 

[역사속 민주주의] 고구려의 마그나카르타 '봉상왕 폐위' 관련이미지1  

 출처 : 픽사베이

 


사자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용맹스러웠고 십자군 전쟁의 지도자로 유명한 영국의 리처드 왕이 죽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동생 존이었다.

 

‘사자’라 불리운 형과는 달리 존 왕의 별명은 ‘실지왕(失地王)이다. 당시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왕보다도 더 많은 프랑스 땅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존이 프랑스왕 필립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거의 모든 프랑스 내 영국령을 상실했기 때문에 얻은 별명이다.

 

전쟁에서 진 것도 딱한 일이었지만 존 왕에게 당혹스런 상황은 또 있었다. 연속된 왕의 실지(失地)와 실정(失政)을 보다 못한 귀족들이 들고 일어나 63개조의 요구사항을 걸고 존 왕을 압박했던 것이다. 존 왕은 완강히 버텨 보았으나 결국 굴복했고 1215년 6월 15일 귀족들이 내민 문서에 옥새를 날인하게 된다. 이 문서가 바로 대헌장, 즉 ’마그나 카르타‘라고 불리는 역사적인 서류다.


[역사속 민주주의] 고구려의 마그나카르타 '봉상왕 폐위' 관련이미지2 
출처 : 위키백과

 


이 가운데 핵심은 귀족 회의, 즉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을 거두지 못한다는 것과 ‘자유인’들은 정당한 합법적 절차 없이 구속되거나 투옥되거나 재산을 압류당하지 않는다는 조항이었다.  즉 국왕의 전횡과 폭정을 제한하고 법에 의거한 통치만이 정당하다는 합의였다.

 

물론 ‘자유인’ 개념에 일반 농민들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고 그로 인한 권리 행사도 할 수 없었다. 즉 근대적 민주주의 개념에 의거한, 보통 사람들을 위한 권리 선언은 아니었다. 그러할지라도 이 대헌장의 의미는 지대하다.

 

그 어떤 절대 권력도 견제 받아야 하며, 권력이 그에 불응할 경우 신민(臣民)은, 또는 국민은 복종을 거부할 수 있다는 전통의 초석이 되는 문서이기 때문이다.   1939년 미국 뉴욕 세계 박람회에서 이 낡은 양피지 문서를 보겠다고 1주일 동안 무려 1천만 명이 긴 줄을 섰던 까닭 역시 거기에 있지 않을까.


[역사속 민주주의] 고구려의 마그나카르타 '봉상왕 폐위' 관련이미지3 
출처 : 위키백과

 

우리나라에는 이런 일이 없었을까. 물론 환경이 다르고 시대가 다르니 절대 비교는 불가능하다. 또 역사적 성취와 전개 방향의 차이도 현격한 만큼 “우리나라의 대헌장”을 찾는 일은 그리 현명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단, 권력자의 부당한 횡포에 저항하여 힘을 합쳐 그 폭정을 종식시킨 사례는 많다. 그 연원은 삼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은 모두 권력 독점을 견제하고 국가 중요 대사를 협의, 결정하는 시스템을 지니고 있었다. 고구려의 제가회의, 백제의 정사암 회의, 신라의 화백 회의가 그것이다. 흉년이 들거나 재난이 나면 왕을 죽였다는 부여의 예에서 보듯, 왕권이 미약하고 부족연맹체 성격이 강하던 시대의 단면이기는 하나 ‘합의’에 의한 의사 결정 구조를 보유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고구려에서 일어났던 일 하나를 짚어 보자.

 

 

 

[역사속 민주주의] 고구려의 마그나카르타 '봉상왕 폐위' 관련이미지6 

출처 : 뮤지컬 "마법사와 쫓겨난 임금"

 


고구려 14대 봉상왕은 매우 의심 많고 잔인한 왕이었다. 그는 즉위한 뒤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친족들에게 칼을 들이댔다. 숙신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삼촌 달가에게 누명을 씌워서 죽였고 자기 동생 돌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했다.

 

 

급기야 그 아들, 즉 조카 을불마저 잡아들이라고 명령을 내릴 정도였으니 봉상왕의 친족에 대한 의심의 집요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어엿한 왕족이었던 을불은 어느 집의 종으로, 또는 소금 장수로 신분을 감추고 무진 고생을 해야 했다. 신분이 드러나면 그대로 죽음일 뿐이었다.




[역사속 민주주의] 고구려의 마그나카르타 '봉상왕 폐위' 관련이미지8 ?
출처 : 위키백과

 


봉상왕 3년(294) 왕은 창조리라는 이를 국상(國相), 즉 수상에 임명한다. 그즈음 고구려는 선비족의 나라 전연과 분쟁을 치르고 있었다. 몇 년간 일진일퇴를 주고받은 끝에 296년 전쟁이 마무리된다. 그러자 봉상왕은 특유의 허영을 드러냈다. 흉년이 들었는데도 대규모 궁궐 증축 공사를 일으킨 것이다.

 

전쟁에 지친 백성들은 혀를 빼물 지경이었다. 그러나 봉상왕은 백성들의 불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국상 창조리가 봉상왕에게 이러시면 안 된다고 충언하자 봉상왕은 이렇게 반문한다.

“임금은 백성들로부터 우러름을 받는 이인데, 궁궐이 초라하면 무엇으로 위엄이 서겠는가?”
그러고는 창조리에게 묘한 말을 한다.
“지금 나를 비방하여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얻겠다는 것인가?”

영국의 존 왕이 국내 귀족들의 만류에도 무릅쓰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다가 판판이 졌음에도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지 않고 전쟁을 계속하려했던 것처럼, 봉상왕의 궁궐 집착도 대단했다.  그러나 국상 창조리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봉상왕 앞에서 창조리는 공손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한다.

“임금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어진 임금이 아니요, 신하가 임금에게 충언하지 않으면 충신이 아닙니다.”
이 충성스러우나 도전적이기도 한 말을 들으며 봉상왕은 ‘웃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는 칼이 숨겨져 있었다.

“백성을 위해서 죽기라도 하겠소?”
이 말을 듣고서야 창조리도 더 할 말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도 않았다. 은밀히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고, 시골로 도망가 숨어버린 왕의 조카 을불을 찾아 데려오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한다

아마 그가 사람을 모을 때 가장 많이 속삭인 얘기는 아마도 마그나카르타를 준비하던 영국 귀족들이 하던 말과 비슷했을 것이다.
“왕이 백성을 살피지 않으면 그게 왕인가. 왕이 제멋대로만 하면 나라꼴이 되겠는가.” 정도가 아니었을지.

[역사속 민주주의] 고구려의 마그나카르타 '봉상왕 폐위' 관련이미지9 

출처 : 픽사베이


마침내 때가 왔다. 봉상왕이 신하들과 함께 사냥을 떠났다. 여기에는 국상 창조리도 동행했고 고구려 5부의 고위 관리와 귀족들도 당연히 집결해 있었다. 왕이 사냥에 정신 팔린 틈을 타서 창조리는 사람들을 은밀히 모은다. 5부 귀족들이 긴장한 얼굴로 창조리를 주시하는 가운데 창조리는 결연하게 선언한다.

“나와 뜻을 같이하는 자는 관에 갈잎을 꽂으시오.”

사냥터였으니 다들 무장을 했을 것이고 고구려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절풍 모자를 쓰고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저마다 관에 갈잎을 꽂고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서로의 관에 꽂힌 갈잎을 보고 전율했을 것이다.

“그래. 우리 전부 갈잎을 꽂았으니 무엇이 두려우랴. 폭군을 물리치자.”

고구려판 ‘마그나카르타’ 사태는 그렇게 진행됐다. 창조리는 국왕 폐위를 선언하고 왕의 조카 을불에게 옥새를 바치니 이 사람이 고구려 15대 왕 미천왕이었다.




[역사속 민주주의] 고구려의 마그나카르타 '봉상왕 폐위' 관련이미지9 



역사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에너지 중의 하나는 폭정에 저항하고 마침내 승리를 거둔 이들이 뿜어내는 기쁨과 희망이다. 봉상왕의 폭정을 극복하고 국상 창조리 이하 신하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미천왕은 낙랑군을 완전히 축출하여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 수백년간 드리워졌던 중국 세력을 끝내 몰아낸 역사적 인물로 남는다.

 

독재를 일삼고 자신의 구미에 맞는 궁궐 공사에 백성들을 쓸어넣고 국상과의 소통도 거부하던 봉상왕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첨부파일 : aaaaa212112213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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