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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민주주의] 대화와 타협의 정치 신라의 화백제도

작성자 : 슈퍼관리자 등록일 : 2017-06-21

 

국사기 신라 본기는 신라의 건국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조선(朝鮮)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나뉘어 살아 육촌을 이루었다. 첫째는 알천 양산촌, 둘째는 돌산 고허촌, 셋째는 취산 진지촌, 간진촌이라 한다. 넷째는 무산 대수촌,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진한(辰韓)의 6부가 됐다.”

이후 박혁거세가 등장하고 나라를 세운 것이 B.C 57년이라고 했으니 한무제에 의해 고조선의 왕검성이 함락(B.C 108) 당하면서 조선의 이름이 끊긴 지 반세기 뒤의 일이었다.



[역사속 민주주의] 대화와 타협의 정치 신라의 화백제도 관련이미지1 

 

 


신라의 육촌 사람들이 한무제에 의해 멸망당한 위만조선 출신인지 아니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준왕 등 기자조선의 후예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어쨌건 조선에 뿌리를 두었던 여섯 집단은 다시금 한 나라를 이루어 일어서게 된다.

 

이씨(양산촌), 최씨(고허촌), 정씨(진지촌), 손씨(대수촌), 배씨(가리촌), 설씨(고야촌) 등 6부의 지배자들은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를 왕으로 모셨지만 그들 고유의 의사 결정 체계를 유지했다. 중국의 사서인 수서(隋書)는 신라에서는 “국가 중대사를 군신이 함께 모여 상의하여 결정했다.”라고 밝히고 있고 당서(唐書)에는 이를 ‘화백’(和白)이라 불렀으며 한 사람이라도 반대할 경우 부결되는 만장일치제를 채택하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역사속 민주주의] 대화와 타협의 정치 신라의 화백제도 관련이미지2 


 

1989년 밭 갈던 농부에 의해 발견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서도 이 화백 제도의 어렴풋한 모습이 보인다. 냉수리 비문의 대략적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신라의 실성왕과 내물왕 두 왕이 진이마촌의 절거리에게 재산 취득을 인정하는 교를 내렸는데 계미년 9월 25일에 지증왕 등 각부의 대표 7명이 함께 논의하여 두 왕의 조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한 다음 별교를 통해 절거리가 죽은 후에는 아우 아사노(또는 아우의 아들 사노)에게 재산이 상속되고 미추, 사신지는 재물 분배에 대한 문제를 일으키지 말 것이며, 만약 이를 어길 경우 중죄에 처할 것임을 결정하였고 이 명령은 중앙기관의 전사인 7명과 지방관서의 촌주 2명이 일을 마치고 이 사실을 기록한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즉 지증왕과 6부의 대표가 모여 재산권 분쟁의 결정을 내렸다는 기록이다. 2009년 냉수리와 가까운 중성리에서 발견된 신라비에도 유사한 내용이 등장한다.

 

1988년 발견된 울진 봉평 신라비에는 ”524년(법흥왕 11) 모즉지매금왕(법흥왕)을 비롯한 14명의 6부귀족들이 회의를 열어서 어떤 죄를 지은 '거벌모라(居伐牟羅) 남미지촌'의 주민들을 처벌하고, 지방의 몇몇 지배자들을 곤장 60대와 100대씩 때릴 것“을 판결한 내용이 담겨 있는데 신라의 중앙 관제 17관등을 확립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고대 국가의 기틀이 잡혔던 법흥왕 때에도 6부의 대표들이 그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합의에 의한 국가 의사 결정’이라는 대전제가 건국 후 수백년 동안 유지돼 왔다고나 할까.

 

[역사속 민주주의] 대화와 타협의 정치 신라의 화백제도 관련이미지3 

 


 

유태인들의 경전 탈무드에 따르면 ‘만장일치’는 금지돼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를테면 살인자를 재판하는 재판관들 중 적어도 한 명은 살인자의 무죄를 위해 변론해야 하고, 유죄에서 무죄로 그 뜻을 바꾸는 것은 허용되지만 반대는 허용되지 않았다. 의견이란 기본적으로 대립하는 것이며 치열한 토론과 반론 속에 진실과 정의가 구현될 수 있다는 유태인들의 토론관이 반영되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는 만장일치의 판결보다는 만장일치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문제의식이었다. 화백회의에서도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만장일치제’ 그 자체가 아니라 만장일치에 이르는 토론과 협의의 과정일 것이다.


[역사속 민주주의] 대화와 타협의 정치 신라의 화백제도 관련이미지5 

<출처 : tour.gb.go.kr>


 

신라 25대 왕 진지왕은 신라를 소백산맥 이남의 소국에서 한반도 중부를 장악하고 고구려와 백제에 맞서는 나라로 끌어올린 영걸 진흥왕의 차남이었다. ‘개국’(開國)이라는 연호를 쓸 정도로 자신만만했던 진흥왕이었지만 장자 상속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태자가 일찍 죽었던 것이다. 그래서 진지왕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별다른 기록 없이 진지왕이 얼마 못가 죽은 것으로 돼 있으나 삼국유사 기이편에는 이 진지왕이 ‘국인’(國人) 즉, 나라의 유력자들에 의해 폐위됐다고 기록돼 있다. 이때에도 화백회의는 열렸을 것이다.

 

신라의 영걸이라 할 진흥왕의 아들이 ‘음란하고 정치가 어지러워’ 폐위될 때 어찌 논란이 없었을까. 그러나 신라 귀족들의 결정은 진흥왕의 손자 진평왕이었고 진평왕은 53년이라는 신라 최장 재위 기간을 기록하며 삼국통일의 기틀을 닦게 된다.

이후 28대 진덕여왕이 승하하면서 다음 왕을 추대하는 화백회의가 열렸다. 골품제상 최고의 혈통이던 성골의 대가 끊겨 진골 중에서 왕을 뽑아야 했다. 백제의 공세가 갈수록 심해지고 고구려마저 그에 가세한 상황, 백제와 가까운 왜나라는 신라의 맹방일 수 없었던 외교적 고립 상황. 선덕여왕 말년에 일어난 비담의 난 등 내부의 동요도 만만치 않은 위기에 빠져 있던 신라였다.

귀족들의 1차 추천 대상은 알천이라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경주 남산에서 열린 화백회의 도중 호랑이가 뛰어들어 혼비백산한 일이 있었는데 그 꼬리를 잡아 패대기를 쳐 죽여 버렸을 만큼 용감하고도 굳센 용력의 사나이였다. 진평왕 이래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운 바도 있으니 군사적 정치적 위상도 막강했을 것이다. 그러나 알천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늙었고 뚜렷한 덕행도 없다. 지금 덕망이 두텁기로는 춘추공만한 이가 없다. 그는 실로 세상을 다스릴 영걸이 아니겠는가.” 즉 김춘추를 추천한 것이다.

[역사속 민주주의] 대화와 타협의 정치 신라의 화백제도 관련이미지6 
<출처 : tour.gb.go.kr>




아름다운 이야기이긴 하나 이를 곧이곧대로 들을 수는 없다. 1차 추천 대상이 알천이었다는 것은 알천을 지지하는 이들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는 이야기다. 더구나 김춘추는 화백회의 때 폐위당한 진지왕의 후손이었다. 연륜으로나 벼슬로나 알천은 김춘추보다 상위에 있었다.  얼마나 치열한 논의가 벌어졌을 것인가.

 

알천의 양보는 알천 개인의 인품 탓도 있겠지만 또 다른 외적인 요소도 있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의 지적이다. “알천공이 상좌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여러 어른들은 유신공의 위엄에 복종했다.” 신라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유신이 김춘추를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천의 양보와 지지, 김유신의 강력한 후원에도 불구하고 김춘추는 세 번 사양을 거치고서야 왕위에 오른다.

중대한 사안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서로의 이익과 의사에 따라 조율을 거치고 힘겨루기도 행해지지만 결국 정치적 양보와 배려를 통해 한 나라의 방향이 결정되는 과정이 아니었겠는가.

 

성골의 대가 끊긴 뒤 진골로는 첫 왕위에 올랐고 폐위된 왕의 후손이라는 약점을 지녔던 김춘추 태종 무열왕이었으나 그 치하에서 신라는 이렇다 할 반란 하나 없는 내부 단결을 이루었고 마침내 숙적 백제를 멸망시키는 역사를 이룩한다. ‘협의에 의한 합의’란 그렇게 힘이 세다.


 

[역사속 민주주의] 대화와 타협의 정치 신라의 화백제도 관련이미지7 

<출처 : MBC 드라마 '선덕여왕' 中>


민주주의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민주주의를 근대 이후의 산물로만 인식한다면 인류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는 지극히 짧고 얕은 수준의 단어에 불과하다. 하지만 협의를 거친 합의, 타협과 조율 속에 이루어지는 ‘획일’이 아닌 ‘통일’의 과정이라는 민주주의의 본연의 모습은 세계 역사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신라의 화백제도 또한 그 많은 예 중의 하나일 것이다. 덧붙여 말한다면 협의를 거친 합의 과정이 왜곡되거나 서로의 야욕이 양보와 배려의 미덕에 앞설 때의 파괴력 역시 신라 하대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귀족들 간 벌어진 왕관 다툼은 신라를 병들게 했고 그 와중에 시대에 뒤떨어진 골품제도를 움켜쥐고 있었던 진골들의 나라는 멸망으로 치달았다. 최후의 화백회의는 만장일치가 아니었다. 마지막 경순왕은 아들 마의태자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 고려에 항복했던 것이다.

 


 

첨부파일 : 1awa221121212.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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