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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주주의] 신하, 백성과 소통하며 추진한 영조의 청계천 공사

작성자 : 슈퍼관리자 등록일 : 2017-05-06

 

 

 

 

[선거와 민주주의] 신하, 백성과 소통하며 추진한 영조의 청계천 공사 관련이미지1 

 


1. 영조가 청계천 준천 사업을 한 까닭은?

 

[선거와 민주주의] 신하, 백성과 소통하며 추진한 영조의 청계천 공사 관련이미지2 

 

 


12년 전인 2005년 청계천 복원 사업이 완료되면서 청계천은 서울의 대표적인 명소로 떠올랐다. 개발과 환경이 각각 강조된 시대상에 따라 그 부침을 거듭하였던 청계천. 청계천은 조선시대에도 한양을 관통하는 개천으로 그 조성과 준천(濬川) 사업에는 많은 사연이 있었다.

 

조선의 도읍인 한양은 한반도의 중심지에 자리를 잡았고, 조세의 운송에도 매우 유리했다. 여기에 동, 서, 남, 북 4대 산으로 둘러싸인 형국은 풍수지리적인 측면에서도 명당이었다. 그러나 한양은 홍수에 취약한 도시 구조였다.

 

북악산이나 인왕산, 남산 등지에서 내려와 청계천에 모인 물들이 남산에 막혀 바로 한강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중랑천을 통해 한강으로 나가기 때문에 비가 많이 오면 청계천이 넘치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도성 안의 백성들은 홍수 피해로 몸살을 앓았다. 이러한 문제점을 파악한 태종은 1405년 한양의 도성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하천인 개천(開川)의 준설을 명했다. 이것이 현재 청계천의 원형이 되었다.

 

조선후기인 영조 시대에 와서 청계천 준설은 다시금 국가의 과제로 떠올랐다. 17~18세기의 조선후기에는 상업의 발달에 따라 농촌 인구가 도시로 집중하면서 청계천 주변에는 가난한 백성들이 움막을 짓고 살았고 이들이 버린 오물이나 하수로 청계천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인구의 증가로 도성 안의 벌채가 심해지면서 홍수 시에는 토사가 밀려와 청계천을 매워 홍수에 대한 피해 우려는 한층 심각해졌다. 본격적으로 청계천에 쌓인 토사의 준설, 즉 준천 사업이 요구되었던 시기에 영조는 청계천 준설 사업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갔다.

 

준천 사업을 통하여 당시 도시로 유입하여 실업자가 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청계천을 정비해 홍수에 대비하고 보다 쾌적한 도시를 만들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2. 신하, 백성과 소통하며 추진한 사업

 

 

[선거와 민주주의] 신하, 백성과 소통하며 추진한 영조의 청계천 공사 관련이미지2 

 


1752년 영조는 친히 광통교(廣通橋)에 행차하여 백성들에게 준천에 대한 의견을 물어 보았다. 그리고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2년 전인 1758년 5월 2일에는 준천의 가부(可否) 여부를 신하들에게 물으면서 구체적인 방안들을 추진할 계획을 세워 나갔다. 중요한 국책 사업인 만큼 백성과 신하들의 여론을 최대한 중시한 것이었다.

 

1758년 5월 2일 영조는 숭문당에서 승지 등을 불러들인 자리에서 청계천 다리 중 광충교(廣衝橋)가 작년에 비해 더욱 흙이 빠져 막혀 있음을 우려하였다. 어영대장 홍봉한은 ‘만약 홍수를 만나면 천변(川邊)의 인가는 반드시 표류하거나 없어지는 화를 입을 것입니다’면서 하천 도랑의 준설이 매우 시급함을 건의하였다.

 

일부 사관들은 도랑을 준설하는 것이 급한 일이기는 하지만, 만약 백성을 강제적으로 동원하려 한다면 그 불만이 클 것임을 지적하였고 영조는 여러 의견을 종합하여 장기적인 대책을 세울 것을 지시하였다.

 

1759년 10월 6일 마침내 준천 공사가 시작되었다. 준천을 담당할 임시 관청인 준천소(濬川所)가 설치되었고 홍봉한, 홍계희 등이 준천소 당상으로 임명되었다. 한성부좌윤 구선복은 직접 현장에 가서 준천도(濬川圖)를 그려 오는 등 구체적인 사업이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준천사업은 1760년 2월 18일에 시작되어 4월 15일에 종료되었다.

 

57일간의 공사 기간 동안에 21만  5천 여명의 백성이 동원되었는데, 도성의 방민(坊民)을 비롯하여 각 시전의 상인 등, 지방의 자원군(自願軍), 승군(僧軍), 모군(募軍) 등 다양한 계층의 백성들이 참여하였다. 실업 상태의 백성 6만 3천 여 명은 품삯을 받기도 하였는데, 대략 공사 기간 동안 3만 5천 냥의 돈과 쌀 2천 3백여 석의 물자가 소요되었다.

 

조선전기에는 국가적 토목공사에 백성을 동원하는 경우 강제로 부역시켰지만, 영조는 지방의 백성에 대해서는 강제로 동원하지 않았고, 동원된 백성들에게는 품삯을 지급했다. 이것은 정조대에도 계승되어 정조는 화성 건축 공사에 백성을 동원하면서 품삯을 지급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만큼 백성들의 의식이 성장하고 조선사회가 상업적인 측면으로 변모해가는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한성부의 백성들은 준천 사업이 그들의 편익과 관련되는 일이기 때문에 공사에 참여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파악하고 동원했다.

 

청계천 공사를 완성하고 정리한 <준천사실>의 기록에는 한양의 백성들을 동원하는 것에 대해 영조는 “동포를 위하여 노역(勞役)을 하는 것이니 어찌 천변의 백성과 천변에서 멀리 떨어져 거주하는 백성을 구분하겠는가.

 

내가 이와 같이 유시하는 것은 개천가에 사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산 밑에 사는 사람들이 소나무를 베고 마음대로 경작하기 때문에 모래와 자갈이 흘러서 개천에 쌓이기 때문이다.” 라면서 천변(川邊) 주민뿐만 아니라 한성부 백성 모두가 준천의 역사(役事)에 참여해야 하는 당위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였다. 백성과 소통하고  이해를 구하는 영조의 노력이 보이는 장면이다.

 

공사가 진행되는 기간 동안 영조는 사업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친히 동대문에서 공사를 독려하기도 하였으며, 공사가 완성된 후에는 모화관에서 시재(試才)를 베풀어 국가의 경사를 자축하였다. 또한 일을 감독한 사람들을 인솔하여 연융대(鍊戎臺)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면서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3.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생생한 현장 모습

 

 

[선거와 민주주의] 신하, 백성과 소통하며 추진한 영조의 청계천 공사 관련이미지4 

 


조선시대 왕의 비서실에서 쓴 기록인 『승정원일기』에는 영조가 준천 사업에 매진했던 모습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대화체로 영조와 신하들의 의견을 적고 있어 현장의 생동감이 살아난다. 1758년(영조 34) 5월 2일 영조는 숭문당에 나가 어영대장 홍봉한, 승지, 기사관, 기주관 등과 준천 문제를 논의하였다.

 

영조는 “저번에 광충교를 보니 전년에 비해 더욱 흙이 빠져 막혀 있다. 가히 걱정이 된다.”고 하였고, 이에 홍봉한은 “하천 도랑의 준설이 매우 시급합니다. 만약 홍수를 만나면 천변 인가는 반드시 표류하거나 없어지는 화를 입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영조는 “경들은 도랑을 준천하는 일을 담당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했고, 홍봉한은 진력을 다해 실천할 것을 다짐했다. 이어 영조는 “한양의 백성들을 불러 물은 후에 실시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고 하였는데, 백성과 직접 소통하고자 한 영조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사관(史官)들까지 합세하여 “도랑을 준설하는 것이 급한 일이나, 만약 백성을 동원하려 한다면 초기에는 민원이 많을 것입니다.”고 민원이 일어날 우려가 있음을 제시했고, 영조는 이에 “도성 백성들의 여론을 수집해본즉 준천을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였다.

 

이어서 영조는 구체적인 준천 대책을 신하들과 논의하였다. 하천을 준설한 후에 생기는 사토(沙土:모래흙)는 큰 비가 내리는 날 배로 운반하자는 아이디어도 제시되었다. 1760년(영조 36) 2월 23일 『승정원일기』 기록에는 영조가 구체적으로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 기록이 보인다.

 

영조는 희정당에 머물면서, “나의 마음은 오로지 준천에 있다. 그 동안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라고 물었고, 호조판서인 홍봉한은 “현재 공사에 금위영, 어영청 소속 군사들이 동원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영조는 현재의 동대문에 위치한 오칸수문의 공사가 매우 힘들었는데 6일 내에 일을 마친 것에 대해 격려하였다. 홍봉한은 “이것은 진실로 인중(人衆:다수 백성)의 힘이 하늘을 이긴 것입니다.” 면서 모든 백성이 협력을 해서 공사를 완성한 과정을 보고하였다.

 

 

4. 설득과 통합의 리더십

 

 

[선거와 민주주의] 신하, 백성과 소통하며 추진한 영조의 청계천 공사 관련이미지5 

<출처> sbs 드라마 대박 

 


영조의 추진력과 백성들의 협조 속에 완성된 청계천 공사의 전 과정은 『준천사실』이라는 책으로 편찬되었다. 『준천사실』이 완성된 후 영조는 홍봉한에게 “준천한 뒤에 몇 년이나 지탱할 수 있겠는가?”’를 물었고, 홍봉한은 ‘그 효과가 백년은 갈 것입니다’라고 대답 하였다.

 

영조는 금번의 준천 사업 후에 청계천이 다시는 막히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신신당부하였고, 홍봉한은 “백년 내에는 반드시 막히지 않을 것입니다.”고 자신감을 피력하였다. 홍봉한은 “차후에 한성부의 장관과 삼군문 대장이 주관하여 군문(軍門)에서 각기 약간의 재력을 각출하여 사후 준천의 비용으로 하면 일이 잘 될 것입니다.”라면서 사후 보완대책까지 설명하였다.

 

이어 준천 사업을 기념하는 표석(標石)을 세웠다. 영조는 “표석(標石)은 경진년(1760년)을 지평(地平)으로 새기고 침수되지 않게 해야 유효할 것이다.”라 하였는데, ‘경진지평’ 네 글자를 새기고 이 글자들이 모두 보이도록 늘 토사 관리에 만전을 가할 것을 지시한 것이었다.

 

영조는 재위 기간 내내 청계천의 준천 사업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를 실천하였다. 특히 신하들이나 백성들과 최대한 소통하면서 일을 추진한 점은 오늘날 민주정치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영조는 청계천 준천 사업을 일컬어 균역법과 함께 ‘자신이 재위 기간 동안 이룩한 가장 중요한 사업’이라고 할 만큼 큰 자부심을 보였다. 청계천 준천 사업을 통하여 백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홍수의 위협을 해소하고 실업자를 일부 구제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백성들의 합의와 동기 유발을 이끌면서 청계천 준천 공사를 성공시킨 영조의 사례에서 ‘설득과 통합’의 리더십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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