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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의 선거역사] 마지막 순간까지 반전을!

작성자 : 슈퍼관리자 등록일 : 2016-10-01


미국 대통령 선거 사상 최대 이변의 주인공이었던 트루먼의 후임은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였다. 전쟁 영웅이라는 후광에다 ‘백만 불짜리 미소’로 명성이 자자했던 특유의 친화력을 무기로 아이젠하워는 재선을 넉넉히 달성하고 퇴임을 맞게 됐다. 그 뒤를 이을 제35대 대통령 자리를 두고 미국은 또 한 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반전의 선거역사] 마지막 순간까지 반전을! 관련이미지1 
 

 
공화당 후보는 불과 서른아홉의 나이로 미합중국 부통령이 됐던 리처드 닉슨이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자신의 능력으로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고 ‘교활한 딕’이라는 별명까지 들을 정도로 노회한 정략가로서 젊은 나이에 정권의 핵심부에 진입했던 나이 마흔 일곱 살의 현직 부통령은 부유한 가문의 귀공자로 자라 가문의 후광으로 하버드 동창생이 됐던 마흔 셋의 플레이보이 존 F. 케네디와 맞서게 됐다.

 

케네디는 가문은 좋았으나 미국 상류층의 조건이라 할 WASP, 즉 ‘앵글로 색슨계 신교도 백인’에서 한 발짝 벗어나 있었다. 그는 가톨릭 교도였고 아일랜드계의 후손이었다. 그가 처음 하원의원이 됐을 그때는 스물아홉 살이었는데 “마치 열아홉 살 같았다.”고 할 만큼 동안의 미남자였고 재클린과의 결혼 등 대중의 관심을 끌 요소는 골고루 간직하고 있었지만 부통령을 역임한 리처드 닉슨에 비하면 행정 경험이나 정치적 경륜은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오죽하면 전임 민주당 대통령 트루먼이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이렇게 걱정했을까. “케네디는 너무 젊고 경험이 부족해서 대통령 감이 아니다.” 
 
 

[반전의 선거역사] 마지막 순간까지 반전을! 관련이미지2 


<리처드 닉슨, 이미지 출처-위키피디아>


 
그러나 케네디는 호락호락한 풋내기가 아니었다. 그는 휴가 중임에도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전국에 생방송된 인터뷰 현장에서 그는 “트루먼이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있다.”고 민주당 원로 대통령의 턱을 치받는다. “미국은 젊은 사람들이 건설한 젊은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여전히 젊은이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옛 방식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는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의 기회의 장을 열어 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젊은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케네디는 경험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권력을 독점하는 구세대가 문제라며 자신에게 지목된 문제점의 ‘프레임’을 바꾸어 버렸다.
 
그러나 그래도 정치전문가들과 여론조사의 결과는 닉슨의 우세를 점치고 있었다. 케네디는 그 이미지만큼이나 약점도 많았다. 앞서 말한 종교 문제는 그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미국에는 반가톨릭 성향이 넓게 퍼져 있었고 케네디가 당선되면 로마 교황의 조종을 받는 꼭두각시가 되고 말 것이라는 악성 루머도 퍼졌다.

 

더욱이 40대 초반의 케네디의 나이는 세계 최강대국 미국 국민들에게 확고한 믿음을 주지 못했다.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움 없이 자란 ‘도련님’ 케네디와 자수성가한 전직 부통령이자 ‘연설의 달인’ 리처드 닉슨을 두고 미국인들은 간발의 차로 닉슨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특히 닉슨의 유창한 언변은 케네디를 압도했다. 당시만 해도 라디오 토론회가 선거 운동의 주요한 수단이었기에 ‘오디오’가 약한 케네디는 닉슨을 당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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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F 케네디, 이미지 출처-위키피디아>


 
하지만 케네디에게는 특출한 강점이 있었다. 바로 이미지를 활용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이미지를 활용하는 감각은 케네디를 따르지 못했다. 이를테면 각각의 2차 대전 참전 경험을 얘기하면서 닉슨은 해군 소령 정복을 입은 사진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 깔끔한 제복에는 일체의 약장이 없었다.

 

즉 제대로 된 전투에 나가 공을 세운 적은 없었던 것이다. 보급 장교였으니 당연한 노릇이었겠지만. 반면 케네디는 어뢰정 정장 시절 웃통을 벗고 밝게 웃고 있는 사진을 내밀었다. 이 어뢰정은 일본군에 의해 격침돼 케네디는 동료를 끌어안고 아홉 시간을 버틴 끝에 구조된 바 있었다. 약장 없는 해군 정복을 입은 소령과 전우를 위해 목숨을 건 어뢰정장 케네디. 그 이미지가 어떻게 비쳐졌을지는 말할 필요가 없겠다.
 
이윽고 이미지 활용의 대가 케네디는 세계 미디어 역사에 기록된 승부수를 던진다. TV 보급률이 80퍼센트에 달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여 TV 토론을 벌이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토론’이라면 케네디를 압도할 자신이 있었던 닉슨은 이를 선선히 수락한다. 그의 ‘비주얼’이 케네디의 그것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사실보다는 “토론을 외모로 하느냐”는 자신감이 작용했던 것일까.
 

 

[반전의 선거역사] 마지막 순간까지 반전을! 관련이미지4 
 


 
1960년 9월 26일. 미국 시카고 시간으로 밤 8시 30분. 미합중국 전역에서 약 1억 명의 미국인들이 거실의 TV에 시선을 집중했다. 인류 역사상 최초라 할 대통령 후보들의 TV토론이 펼쳐졌던 것이다. 예상은 노회한 정치인 닉슨 우세였다. 그러나 스튜디오에 나타난 두 사람의 모습을 목도하면서 여론은 빠르게 역류하기 시작했다. 병에 걸려 2주간 병원 신세를 졌던 닉슨은 “ 나 방금 퇴원했음”을 꼬리표로 달고 있는 것 같았다.

 

산뜻하고 짙은 정장을 칼같이 차려입은 미남자 케네디와는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한 골을 먹은 것과 같았다. 또 수염 정리를 게을리 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닉슨의 얼굴은 케네디의 말끔한 얼굴에게 또 한 골을 내주었다. 카메라를 대하는 태도도 달랐다. 케네디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자신감 있는 모습을 드러냈지만 닉슨은 카메라와 시선을 맞추지 못할 정도로 TV 매체에서의 열세를 고스란히 폭로해 버렸다.

 

그래도 토론의 주도권을 쥔 건 닉슨이었고 라디오로 이 토론을 들은 사람들은 닉슨이 이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TV를 보았던 사람들 사이에서 바보가 됐다. “닉슨이 잘했다고? 이 친구 뭘 본 거야?” TV 토론은 네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닉슨이 가장 결정타를 맞았던 것은 1회차 토론이었다는 평이다.
 


 

[반전의 선거역사] 마지막 순간까지 반전을! 관련이미지5 


<취임식을 올리는 존 F 케네디, 이미지 출처-위키피디아>


 
운명의 대통령 선거. 케네디는 49.7%, 닉슨은 49.6%의 득표를 얻는다. 겨우 11만 표 차이였다. 시카고에서는 부정선거 시비가 있었고 하와이 주에서는 닉슨 승리를 선언했다가 재개표 끝에 뒤바뀌었다. 즉 닉슨이 이의를 제기하면 어떤 정치적 파장이 올지 모를 정도의 박빙에다가 문제점도 많았던 선거였다.

 

그러나 닉슨은 뼈아프게 승복한다. 이 승복의 이미지는 6년 뒤 그를 다시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이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은 그 달변을 접고 침묵을 택한다. 공화당 후보 지명전이나 본선에서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정도의 다짐 외에는 말을 아끼고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이 침묵을 통해 닉슨은 ‘믿을 수 있는 닉슨’의 이미지를 구축했고 이미 6년 전에 차지했어야 마땅할지도 모를 백악관 주인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필진 : 김형민 PD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 전공인 국사와 세계사를 틈틈히 공부해 SNS와 블로그에 '산하의 오역'이란 제목으로 역사관련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렇게 모은 글을 엮어 '그들이 살았던 오늘'의 제목으로 책을 냈다. 현재 sbscnbc에서 PD로 활동 중이다.

첨부파일 : bj20161011000004.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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