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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민주주의] 조선말 민의수렴기구 집강소

작성자 : 슈퍼관리자 등록일 : 2016-08-09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 민주주의를 가장 간결하고 정확하게 정의한 한 문장일 것이다. 집강소는 비록 짧은 기간 동안 운영되었지만 국민의 요구 실현과 자치 기구 설립을 위한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민 자치 기구였다,”


1894년 갑오년 조선은 폭풍에 휘말렸다. 폭풍의 진원지는 전라도 고부였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주도로 일어난 농민 봉기는 고부는 물론 인근 고을을 휩쓸었고 마침내 전라도 감영 소재지이자 풍패지향(풍패는 한나라 유방의 고향, 즉 태조 이성계의 고향을 뜻함)을 위협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전라 감사 김문현을 파직시키고 후임자를 고르려 했으나 아무도 자원하지 않았다. 난리가 난 전라도에 가는 것은 ‘잘해 봐야 본전’이었고 여차하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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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2월 체포되어 한성부로 압송되는 전봉준 / 출처 : donghak.gochang.go.kr>

 

이 막중하고 복잡한 임무를 맡은 것이 김학진이라는 사람이었다. 전라도로 가라는 어명을 받은 김학진은 그는 고종 앞에 엎드려 대담한 청을 한다. ‘편의종사(便宜從事)’ 즉, 일일이 보고하여 허락을 구하지 않고 현지에서 감사가 알아서 처결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한 것이다. 고종은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으나 김학진은 완강했고 어쩔 수 없이 편의종사의 권한을 허락한다.

 

김학진은 전라 감사가 되어 남쪽으로 향했으나 전주 인근의 삼례에 이르렀을 때 농민군에 의해 전주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전라 감사가 좌정해야 할 전라 감영이 농민군의 손에 떨어진 것이다.

 

사태는 더욱 심각하게 돌아갔다. 전주를 잃은 고종과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고 청나라가 이를 받아들이자 예의주시하던 일본도 청나라의 개입을 빌미로 군대를 들이밀었다. 농민 봉기 때문에 조선에서 청일 양국 군대 간 전쟁이 벌어질 판이었다. 농민군들 역시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관군과 ‘전주 화약’을 맺고 폐정 개혁안을 제시한 후 해산하게 된다.  김학진은 농민군들의 해산 이후에야 전주 감영에서 업무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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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운동 당시 사발통문(격문) / 출처 : 위키피디아>

 

조선 정부는 청일 양국군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일본은 그를 수용할 뜻이 없었고 오히려 경복궁을 습격, 장악하고 친일 김홍집 내각을 수립한다. 이런 긴박한 상황 하에서 김학진은 그가 고종에게서 받아 낸 편의종사의 권한을 백성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쪽으로 사용하게 된다. 김학진이 농민군에게 보낸 제안을 읽어 보자.

 

 “폐정은 작은 것은 뜯어고치고 큰 것은 조정에 보고하겠다. 농민군들이 생업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장하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이미 설치된 집강을 통해 감영에 전달해 달라. 금년의 각종 세금 면제하겠다.”
 
여기서 나타나는 ‘집강’을 보자. 조선 시대에는 요즘의 이장격으로 각 마을의 일을 맡아 보던 삼소임(三所任)이 있었는데 이들은 풍헌, 동장, 집강으로 불렸다. 이 집강을 통해 요구 사항과 시정해야 할 문제를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김학진이 행정상의 공백을 백성들의 자치적 역량으로 메우고자 했음을 의미한다.

 

마침내 동학 농민군의 수장 전봉준과 조선 왕조의 전라도 관찰사 김학진은 담판을 통해 농민들의 자치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고 행정권을 상당 부분 위임하는 데에 합의하기에 이른다. 전라감사 김학진은 자신의 집무실을 전봉준에게 내 주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는 한편 각 고을의 수령들에게 집강소 설치는 물론 그들을 적극 도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우리 역사에 보기 드문 ‘국민 자치’의 실현이었다. 김학진이 내린 지시의 일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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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들의 꿈의 집결지, 집강소 / 출처 : www.jsghnews.com>

 

“지금 이후에는 모두가 개과한 평민이니 지난 허물을 절대로 지목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그들의 말이나 출입에 털끝만큼이라도 거리낌이나 막힘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다. (중략) 무뢰배로서 빙자해서 소란을 일으키는 자는 농민군 중에서 집강을 정하여 잡히는 대로 본 고을에 넘겨야 할 것이다. (중략) 탐사해서 잡아들임에 혹 소홀함이 있어 부득불 지방관에게서 힘을 빌려야 할 경우에는 고을 수령은 농민군과 합력하여 체포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전라도 56개 고을 가운데 52개 고을 (목사 민종렬이 완강하게 저항한 나주와 제주도 3고을 제외)에 집강소가 설치됐다. “집강소에는 집행 기관으로 서기(書記)성찰(省察)집사(執事)동몽(童夢) 등의 직책이 있었는데, 이들은 집강의 지휘를 받으면서 조세 징수 등 행정 관련 사무를 처리하였다.

 

의결 기관으로는 읍마다 의사원(議事員) 약간을 두고 이를 통해 정책과 의사 결정을 하였다. 한편 집강소에는 동학 농민군의 무력으로 호위군을 두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이때 수령은 형식상의 지위였고, 서리는 동학에 가입해야만 위치를 지킬 수 있었다.” (국사편찬위 우리 역사넷, ‘사료로 보는 한국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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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부안의 원평 집강소 / 출처 : www.hankyung.com>

 

이 집강소를 중심으로 오랫동안 억눌려 온 백성들의 욕망은 격렬하게 터져 나왔다. 백성들을 괴롭히던 탐관오리와 부호들이 된서리를 맞았고 농민들을 괴롭히던 고리채는 엄하게 단속됐다.  “私債(고리채)는 시비 불문 절대로 시행치 못하게 하며 이 지시를 어기는 자는 마땅히 보고하고 처벌하라.” (전봉준이 각 접강소에 보낸 글) 토지 제도가 개혁됐고 미곡의 일본 유출을 막았다. 농민들은 물론 백정과 노비들까지도 양반 앞에서 허리를 펴고 어깨에 힘을 주었다.

 

 “주인을 위협하여 노비문서를 태우고 양인이 됨을 강제하거나 주인을 결박하여 주리를 틀고 곤장을 치기도 하였다..... 백정, 광대에 속하는 무리(최하층 천민들이었음) 도 역시 평민 사족과 평등하게 예를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더욱 이를 갈았다.” (매천 황현의 오하기문 중) 

 

양반들로서야 이를 갈아도 모자랄 ‘무법천지’였겠으나 이는 엄격한 봉건 신분제에 저항하는 평등 사상의 구현이었고 인내천(人乃天)이라는, 천부인권 사상이 반영된 동학 교리에 대한 사람들의 호응이었다. 사람은 곧 너와 나 할 것 없이 하늘일 뿐인데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을 수 없고 하늘 아래 하늘도 가당치 않다는 생각이 전라도 일대에 퍼졌고 1894년의 봄과 여름과 가을의 전라도는 그때껏 누려보지 못한 국민들의 자치를 경험하게 된다.

 

비록 그 운영 과정에서 지나친 한풀이와 난폭한 행동도 있었고 제2차 봉기에서 농민군이 우금치 전투에서 궤멸당하면서 정부의 조직적인 반격에 의해 집강소 시대는 짧은 운명을 다하지만 “지금처럼 살 수 없다.”라는 국민들의 개혁에 대한 열망, 그리고 집강소를 통해 실시됐던 개혁의 단초들은 갑오경장 등 근대적 개혁의 밑거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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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강소 시기에 호남우도의 중심부 역할한 원평 장터 근처에 남아있는 집강소 건물 / 출처 : jeonlado.com>

 

링컨이 참으로 간결하고 정확하게 정의했듯 “민주주의는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다. 즉 국민의 요구와 이해를 대변하고 국민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며 궁극적으로 국민의 뜻이 실현되는 것이 민주 정치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민 자치 기구라 할 집강소의 짧은 역사는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임금에게 받은 편의종사의 권한을 국민의 요구 실현과 자치 기구 설립에 썼던, 우리 역사상 보기 드문 관리 김학진의 이름도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미디어과>

첨부파일 : 2016080900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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