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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선거역사] 우리나라 최초 연예인 국회의원 당선기

작성자 : 슈퍼관리자 등록일 : 2016-08-02

 


많은 이들이 영화 <카사블랑카>를 추억의 명화로 기억한다. 험프리 보가트의 우수 젖은 눈빛과 잉그리드 버그만의 열정적인 눈빛, 그리고 흑인 피아니스트가 멋지게 연주하던 ‘As time goes by'의 주제음악까지. 그런데 원래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물망에 올랐던 사람은 험프리 보가트만이 아니었다. 로널드 레이건이라는 배우도 있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바로 미국의 40대 대통령이요 소련과의 냉전에서 승리한 역사적 인물로 기억되는 그 로널드 레이건이 맞다. 배우 출신으로서는 첫 미국 대통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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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레이건 / 출처 : 위키피디아>

 


영원한 ‘터미네이터’ 아놀드 슈왈제네거도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냈고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소도시의 시장에 당선됐으니 배우 출신 정치인들이 꽤 많다 싶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미국은 의외로 보수적인 사회라 연예인들의 정치적 참여는 자유로워도 실제로 정치에 뛰어드는 일은 의외로 드물다고 한다.

 

오히려 코미디언 (이주일) 부터 영화배우(최무룡, 신성일), 가수(최희준)에 아나운서들(유정현, 한선교)과 탤런트(강부자, 이순재)들까지 골고루 국회의원직을 차지했던 한국이 연예인들의 정계 진출이 활발한 경우가 될 것이다. 그럼 최초의 연예인 출신 국회의원은 누구일까? 정답은 1978년 제10대 총선에서 당선된 탤런트 홍성우였다.   

 

그가 탤런트가 된 동기는 매우 유별나다. 그는 7살 때부터 대통령이 꿈이었고 (이건 얼마 전 고인이 된 김영삼 대통령과 유사하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이름을 빨리 알릴 수 있는 수단으로 탤런트를 택했다고 한다. 그가 경희대학교 1학년 때 당시 톱스타였던 김진규의 집에 찾아가설랑 길을 막는 가정부의 뺨을 때리는 등 일대 소동을 일으켜 김진규를 대면하고는 다짜고짜 “15년 뒤에는 배우도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던 매우 저돌적인 걸물이었다.

 

탤런트가 되긴 했으나 처음에는 당연히 누구도 거들떠 봐 주지 않는 무명이었다. 방송사 복도에서 유명 작가를 만나자 그는 달려가 이렇게 부르짖었다고 한다. “선생님,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 잘 키워주시면 이 나라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할 홍성우입니다. 저 좀 키워주세요.” (문화일보 2012년 5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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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시절 홍성우 / 출처 : TV조선 대찬인생>

 


그는 1974년 드라마 <데릴사위>로 비로소 ‘뜬다’. 재벌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재벌가의 딸을 휘어잡는 판타지(?)였으나 본디 그의 성품과 잘 맞아 떨어지는 배역이어선지 드라마는 시청률 78퍼센트라는 입이 딱 벌어지는 수치를 기록했고 홍성우 이름 석 자와 그 넓적한 얼굴은 국민들에게 널리 그리고 깊이 인상을 남겼다. 스타가 됐지만 그의 꿈은 그래도 정치인이었다. 사극이나 형사물의 범인 역은 쳐다보지도 않을 정도였다. “범인 같은 거 하면 이미지 나빠지기 때문”이었다. 

 

그가 뜬 다음 첫 선거가 돌아왔다. 1978년 제10대 선거였다. 나이 서른 일곱의 홍성우는 대뜸 출마를 선언한다. 출마지는 서울 도봉이었다. 이 지역에는 현직 야당 국회부의장 고흥문과 공화당의 신예 신오철이 버티고 있었다.

 

공전의 히트를 친 드라마 주인공이라고는 하지만 이렇다 할 경력도 없고 나이 불혹도 못 넘긴 ‘딴따라’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한다는 소문이 알려지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코웃음을 쳤다. 선거를 예상한 신문기사를 보면 홍성우의 출마 소식은 흥미롭게 전하고 있으나 당시 도봉 선거구는 “신오철씨가 고흥문 의원의 득표에 어느 정도 근접할 것인가”가 관심사였고 다른 야당으로 출마한 야당인사와의 3파전이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동아일보 1978년 9월 25일) 여기에 박정희 대통령의 사촌인 박경희라는 사람까지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이 ‘죽음의 조’ 도봉구에서 홍성우는 아예 관심 밖이었다. 어떤 당의 공천을 받지 못한 무소속, 그야말로 얼굴 하나와 튼튼한 팔다리만 가진 도전이었다. 이 도전의 무모함을 한껏 드러낸 것이 11월 24일의 선관위 후보 등록 때였다. 당시 기탁금은 5백만원. 하지만 홍성우가 갖고 온 것은 그 절반인 250만원이었다. “내일 다시 채워 오겠소!” 황당해하는 선관위 직원들을 뒤로 하고 돌아선 홍성우는 기어코 나머지를 장만하여 선거에 입후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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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우 후보의 선거벽보 / 출처 : SBS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

 

그에게 우군이 있다면 동료 탤런트들 수십 명과 이른바 ‘거지왕 김춘삼’이 이끄는 걸인들었다.  동료 탤런트들은 유세장에 출동하여 바로 몇 달 전까지 함께 연기하던 동료를 위해 응원을 아끼지 않았고 걸인들도 옷을 갈아입고 홍성우를 외쳤다. 홍성우의 선거 전략은 사실 별 것이 없었다.

 

그는 유세 내내 “없는 사람의 한을 풀러 나왔으니 여러분의 한을 풀어 드리겠다.”고 외치고 다녔고 폼 나는 유세 대신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돌아다니며 위문 잔치를 펼쳤다. 그러면서 “봉사자의 자세가 없는 이는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고 일갈하며 상대 후보들을 때 되면 날아오는 철새로 몰아붙이며 기세를 올렸다. 

 

기인 같았지만 홍성우는 정치인으로서 모든 것을 다 걸었던 사람이었다. “탤런트만으로도 먹고 살 그가 시장바닥에서 옹기장사를 시작했다. 부업이 아니었다. 탤런트로 번 돈은 물론 옹기장사의 이익금까지 몽땅 외로운 노인들과 불우이웃돕기에 털었다. ‘뚝배기’는 그래서 얻어진 별명이다. 10년을 한결같이 그런 일을 되풀이했다.”(1978년 12월 14일 경향신문) 그래서 세 아이를 두고 아내도 집을 나가 버렸지만 홍성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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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식을 접한 홍성우 당선자 / 출처 : 한국일보 http://me2.do/FI0Fw4Jl>

 


이 뚝심 앞에 현직 국회부의장의 아성도, 공화당 신예의 날카로움도, 저 높은 곳에 계신 대통령의 사촌도 점차 긴장하기 시작했다. 선거 후 개표가 진행되고 홍성우 후보가 공화당 신오철 후보를 1.5배 이상 앞서 나가자 개표장에서는 홍성우 쪽이고 다른 쪽이고 할 것 없는 환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 홍성우가 이긴다.” 고흥문 1등, 그리고 홍성우 후보가 2등 당선이었다. 10대 총선 최고의 이변이었다.  

 

“우리는 열심히 산다. 우리는 불우한 이웃을 돕는다. 우리는 절대로 울지 않는다.”는 좌우명을 아들들과 함께 복창하며 살았던 홍성우 ‘의원 당선자’는 당선 확정 후 몰려든 기자들 앞에서 그 좌우명을 지키지 못한다. 그야말로 주저앉아 펑펑 울어 버린 것이다. 그가 살던 곳은 그때만 해도 도봉구에 속했던 상계동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힘없고 불우한 이들에게 10년의 세월을 꾸준히 바쳤고 결국 최초의 연예인 출신 국회의원이라는 이변이자 기적을 창조했던 것이다.

 

 

필진 : 김형민 PD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 전공인 국사와 세계사를 틈틈히 공부해 SNS와 블로그에 '산하의 오역'이란 제목으로 역사관련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렇게 모은 글을 엮어 '그들이 살았던 오늘'의 제목으로 책을 냈다. 현재 sbscnbc에서 PD로 활동 중이다.

 

 

첨부파일 : 2016080200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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