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텔링

HOME > 알림 > 스토리 텔링 > 스토리 텔링
좋아요 0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네이버블로그 프린트

[오늘의 선거역사] 6.25 직전 혼란 속 5.30 제2대 총선

작성자 : 슈퍼관리자 등록일 : 2015-08-01

"6.25 직전 혼란 속 5.30 2대 총선"

 


우리나라 국회의원의 임기는 대체로 4년이었다. ‘대체로’라는 말을 쓴 이유는 예외도 있기 때문이다. 제4공화국 (유신) 시절 국회의원 임기는 대통령과 함께 6년이었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회의원, 유정회 의원은 3년) 그리고 제헌 국회의 경우에는 제헌 헌법 제33조에 국회의원 임기 4년을 규정하고 있었으나 미 군정청 법령에 의해 실시된 제헌 국회의원의 임기는 2년으로 한정됐다. 첫 총선과 제헌과 정부 수립의 어수선함을 거친 후 대한민국 헌법에 규정된 4년 임기의 국회의원 선거가 처음 치러진 것은 제2대 총선이었다.

 

선거역사 2016 

 

<제헌 국회 총선 투표 광경 / 출처 : 위키피디아>

 

기실 1948년 5월 10일 치러진 제헌국회의원 선거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 김구를 위시한 상당한 정치세력이 불참했고 좌익의 테러 위협 속에서 삼엄한 경비는 물론 ‘개입’까지도 이뤄진 일이 비일비재했다. UN임시위원단 위원장 야심 머기(시리아)가 "한국은 경찰국가일 뿐만 아니라 선거 지지파들이 경찰과 긴밀히 연계하고 지방 관청을 장악하여 완벽하게 선거를 좌지우지 하고 있다.“고 토로한 것은 그 한 예가 되겠다. 5.10 선거의 투표율은 95.5%, 아마도 영원히 깨지지 않을 기록적인 투표율로 기록되지만 미곡 배급 통장을 투표자 등록 현장에서 배부하는 등의 행태가 만연했던 점 등을 비춰 보면 일종의 ‘강제 투표’ 내지 ‘동원 투표’가 반영된 측면도 없지 않다.

 


제주도에서 4.3 사태가 격화되고 그를 진압하기 위해 여수에 주둔시켰던 군 부대가 반란을 일으키고 ‘빨치산’들이 내륙 산간 지대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38선에서는 무력 충돌이 끊이지 않는 어수선함 속에서 2년이 흘렀고 이번에는 정식 임기 4년의 국회의원을 뽑아야 할 때가 왔다. 1950년 5월 30일. 날짜를 곰곰이 되새겨 보자. 바로 동족 상잔의 민족사적 비극 6.25가 발발하기 불과 25일 전이었다.

 

선거역사 201601 

 

<5.10 총선 투표율 / 출처 : 위키피디아>

 

그나마 2대 국회의원 선거는 5월에 치러지지 않을 뻔 했다. 판세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선거를 12월로 미루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이 시도에 브레이크를 걸면서 선거는 제대로 된 임기에 맞춰 시행되게 된다. 그럼 이승만 대통령은 왜 선거를 연기하려는 마음을 먹었을까. 2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분위기가 형성됐던 것일까.

 


우선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 문제에서 민심을 잃고 있었다. 영화 <암살>에서 일제의 밀정 염석진(이정재 분)이 반민특위 재판정에 출두하여 자신의 무죄를 항변하고 “다 나라를 위한 일이었어. 멍청한 조선놈들 먹여 살려야 되니까.”라고 뇌까리던 바로 그 모습처럼, 상당수의 친일파들이 ‘대한민국 건설’의 핵심부에 재진입 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백범 김구는 총에 맞아 죽었고 항일 투쟁의 전설 김원봉은 노덕술 등 악질 친일 경찰의 등살에 시달리다가 북한으로 향했다. 반민특위는 대한민국 국립 경찰의 손에 와해됐다. 당시 정계를 주도하던 두 축, 이승만의 세력이나 그와 대립하던 한국 민주당 계열이나 ‘친일’ 문제에 있어서는 자유롭지 못했고 선거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증폭되었다.

 

선거역사 201602 

 

<1948년 5월 30일 제헌국회 총선 정당별 의석수 / 출처 : 위키피디아>

 


2대 총선은 1대와 마찬가지로 소선거구제로 선거구별 최다수 득표자 1인을 당선인으로 선출하는 방식으로 치러졌다. 정원은 200석에서 210명으로 10석이 늘었지만 선거 출마자들의 폭은 제헌의회에 비해 주목할 만큼 확대됐다. 선거가 무슨 의미이며 선거에서 출마된 국회의원이란 어떤 의미인지가 국민들에게 전파됐고 거기에 참여하려는 이들의 양적 질적 확대가 이뤄진 것이다. 당장 선거 출마자가 2209명, 10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제헌의회를 보이콧했던 남북협상파도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한국민주당의 후신인 민주국민당과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국민당 외 39개 정당과 단체가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승리자 그룹은 ‘무소속’이었다. 정당 정치가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탓도 있겠으나 기존 정계에 대한 불신의 의미도 배제할 수는 없겠다. 선거 결과 의석 배분은 무소속 126석, 이어 민주국민당과 대한국민당이 각각 24석, 국민회가 14석, 대한청년단이 10석, 대한노동총연맹과 일민구락부가 각각 3석, 사회당이 2석, 민족자주연맹이 1석, 기타가 3석이었다. 대통령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은 탈탈 긁어 모아도 57석 정도였다고 하니 대통령 이승만으로서는 상당한 정치적 위기였다. AP 통신은 당시의 선거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승만 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이 무소속을 가장하여 출마할 것이니 주의하라고 경고하였으나 투표자들은 이 경고를 거절하였다.” (1950년 6월 2일자 동아일보) 그리고 이미 부산에서는 몇 명의 후보자가 공산주의자 혐의를 받고 투옥됐음을 전하고 있다.

 

 선거역사 201603 

 

<이승만 대통령 / 출처 : 위키피디아>

 


1950년 6월 2일 제헌국회가 그 역사적 임무를 다하고 폐회를 선언했고 6월 19일 오후 제2대 국회는 우렁찬 팡파르와 함께 출범을 선언한다.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국회의장단이 결정됐다. 국회의장 신익희 부의장 장택상 조봉암. “자유의 성전(聖殿)! 평화의 전당! 신국회의 첫날 인상은 지나치게 엄숙하였고 봄날과 같이 평화로운 가운데에서 문을 닫았다.” (1950년 6월 20일자 동아일보) 국회에 나와 축하 연설을 행한 이승만 대통령은 떨떠름했을 것이고 국회 개원식 하루 전 38선을 시찰했던 미 국무장관 덜레스는 긴장 가운데 새로이 출범한 한국 국회를 보며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평화로운 가운데’ 개원식을 치른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의 임기 중 펼쳐 보일 포부를 가늠하며 상기된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2대 국회의원들의 ‘평화’는 1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개원식을 치른 6일 뒤 북한이 전면 남침을 강행했던 것이다. “아침은 개성,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던 국군 수뇌부의 호언은 글자 그대로 망언이 됐고 개전 당일 아침 개성이 함락됐고 인민군 탱크부대는 거침없이 서울을 향해 죄어들었다. 1950년 6월 27일 새벽 1시 국회 본회의가 열렸다. 이미 참석자는 210명 정원 중 절반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그래도 국회의원들은 결기를 세워 “1백만 애국 시민과 함께 수도 서울을 사수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그러나 이 결의안을 들고 경무대를 찾은 신익희 의장과 조봉암 부의장은 놀랍게도 이승만 대통령이 이미 서울을 떠났다는 경악할만한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국회의장조차 따돌린 채 행정부의 수반이 피난을 떠나는 어처구니없는 나라. 2대 국회는 수도 서울과 함께 혼란에 빠졌다. 24명의 의원들이 전란 중에 납북되거나 월북했고 나머지는 무작정 ‘남쪽으로’ 도망쳤다.

 

선거역사 201606 

 

<1941년 죽산 조봉암의 가족사진 (뒷줄 맨 오른쪽이 조봉암) / 출처 : 위키피디아>

 

그 와중에 국회의 품위를 지킨 건 부의장 조봉암이었다. “가족들 대신 국회 기밀서류를 싣고 남하했다. 그 때문에 정작 자신의 부인을 데려오지 못했고, 서울에 남은 부인은 나중에 북한군에 강제로 납북돼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죽산 조봉암 선생 명예회복 주비위' 조인환 위원장 증언, <한겨레> 2005.8.10) 비운의 2대 국회는 피난 수도 부산에서 명맥을 이으며 그 임기를 이어가지만 아직도 시련은 많이 남아 있었다.

 


필진 : 김형민 PD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 전공인 국사와 세계사를 틈틈히 공부해 SNS와 블로그에 '산하의 오역'이란 제목으로 역사관련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렇게 모은 글을 엮어 '그들이 살았던 오늘'의 제목으로 책을 냈다. 현재 sbscnbc에서 PD로 활동 중이다.

 

정정당당스토리 

 

첨부파일 : 20160202005.jpg

공공누리가 부착되지 않은 자료들을 사용하고자 할 경우에는 담당부서와 사전 협의 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만족도

평가하기

- 담당부서 : 홍보과 / 02-503-27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