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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도 연애처럼]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작성자 : 슈퍼관리자 등록일 : 2015-03-01

[정치도 연애처럼]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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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나는 야구팬이 되었다. 정말이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고교야구의 열성 팬이던 엄마는 1982년 프로야구가 개막하자 당시 꼬꼬마이던 나를 업고 거의 매일 야구장으로 출근하셨다. 그때의 기억은 편집된 자료 화면처럼 몇몇 장면으로만 남아있다. 나는 종이로 만든 썬캡을 쓰고 빈 관중석 사이를 아장아장 돌아다녔다. 3루 관중석에서 그물망을 붙잡고 그라운드를 내려다보면 캐치볼을 하던 야구선수 아저씨들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경기에 정신이 팔린 엄마는 작게 발라낸 전기통닭의 살점을 자꾸만 내 입이 아니라 볼에 갖다 댔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보다 힘이 센 건 물에 젖듯이 천천히 빠져드는 사랑이다. 그런 사랑은 눈동자의 점처럼 떼어낼 수가 없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열렬한 야구팬이 되어 있었다. 이건 생각보다 심각한 얘기다. 만약 어떤 남자가 나를 사랑한다면, 그는 ‘야구팬인 나’도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월요일과 비 오는 날만 빼고 매일 평균 3시간씩 경기를 하는 스포츠에 일희일비하는 여자를 사랑하는 건 어떤 남자들에겐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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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는 야구는 물론이고 그 어떤 스포츠에도 큰 관심이 없는 남자였다. 사실 무언가에 소리를 지르며 열광하는 모습 자체가 잘 상상이 안 되는, 내가 아는 한은 늘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귀기 시작했을 무렵 그는 한동안 경기결과에 화를 냈다가 좋아했다가 흥분했다가 낙담하기를 반복하는 나를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았다(그렇다, 나는 데이트를 하면서 몰래 경기 상황을 체크하는 주제에 표정관리도 제대로 못 하는 몰지각한 애인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그가 물었다. “대체 야구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아?” 그 질문을 하는 얼굴에는 비꼬거나 탓하는 기색이라곤 없이, 그저 순수한 호기심만이 있었다. 하긴 B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자신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에 홀딱 반해있는 셈이었다. “음… 그냥 나는 원래 야구를 좋아했어.” 나는 뭐라 설명할 길이 없어서 좀 바보 같은 대답을 했다. 야구를 왜 좋아하느냐고? 야구를 안 좋아할 수도 있는 거야? 잠시 침묵이 흐른 후 B가 불쑥 “내일 야구 보러 갈래?”라고 물었다. 지구에 막 도착한 화성인이 ‘내일 야구 보러 가자’고 했어도 내가 그렇게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어…? 자기는 야구에 관심 없지 않아?”

“아냐, 나도 예전엔 야구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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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일은 다음 날 잠실 야구장에서도 계속됐다. 내가 응원하는 팀의 타자가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B는 그 선수와 관련된 정보를 줄줄 읊었다. “저 선수 와이프가 유명한 모델이라며?” “XX가 어제 경기에서 보여준 수비는 완전 메이저리그 수준이던데?” “ㅇㅇ은 이번 시즌 끝나면 FA 대박 나겠더라.” 1회 초가 끝나기 전에 나는 알아챘다. B는 오늘 나와 야구장에 오기 위해 어젯밤 경기 하이라이트를 챙겨 보고 스포츠 기사를 검색하며 예습을 한 것이다.


그가 선수 두 사람을 혼동해서 말했지만 나는 “응응” 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두산 베어스의 4번 타자가 박찬호라고 말했더라도 나는 “응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나를 이해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노력하고 있다는 것, 실은 그 노력만으로도 이미 나를 이해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 말고는 그 순간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날 나는 평생 처음으로 눈 앞의 야구 경기를 건성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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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만큼 온갖 아포리즘이 넘쳐나는 주제도 드물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상대를 이해하고 싶어서 끝없이 노력하는 마음’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역시나 대책 없는 스포츠 팬인 작가 닉 혼비는 “인간은 모두가 하나의 섬이다.”라고 썼다. 제각기 떠 있는 두 섬 사이에 오붓한 다리를 놓는 것이 연애라면, 뿔뿔이 흩어진 여러 섬을 ‘군도’라는 이름으로 묶어주는 것은 아마도 정치일 것이다.


정치와 선거는 사랑처럼 애틋한 감정이라기보다는 냉철한 전략이 개입된 행동방식에 가깝지만, 그것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어떤 전략도 쓸모없이 공허한 구호일 뿐이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라면, 향후 몇 년간을 좌우할 정책을 구상하는 사람이라면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 출산율을 끌어올리겠다는 구호는 지금 젊은 세대가 왜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고 있는지를 근본적으로 이해해야 비로소 진짜 정책이 된다. 세대와 계층 간의 갈등, 특히 ‘슈퍼갑’이나 ‘헬조선’ 같은 신조어를 둘러싼 설왕설래를 그저 “우리 때는 말이지…” 정도로 접근해서는 날이 갈수록 갈등의 골만 깊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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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지만 사랑에 빠진 우리는 영영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마음 이해합니다.”는 대부분 “그 마음을 이해하고 싶습니다.”나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의 의미이기 쉽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치가, 선거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정치인들이 계속 노력하기를 바란다. 편의점 계산대의 중년 여성을,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 학생을, 지친 얼굴로 퇴근하는 회사원을, 매일 오가며 마주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기를 바라고, 기대하고, 요구한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요구다. 수많은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공동의 지향점으로 아우르는 정치가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는 연애보다 쉬울 리가 없지 않은가.  

첨부파일 : 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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