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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선거역사

작성자 : 슈퍼관리자 등록일 : 2015-09-21

 

프랑스의 7월 혁명, 투표권을 위한 그들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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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들라크루아의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 출처 :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

 


프랑스 혁명, 그리고 그 외에도 폭정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봉기를 상징하는 회화사상 걸작으로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빼놓을 수 없다. 들라크루아는 1830년 파리를 뒤덮은 ‘영광의 3일’, 즉 7월 27일부터 29일에 걸친 7월 혁명을 지켜본 경험을 바탕으로 이 걸작을 창조했고 정장에 소총을 든 자신의 모습까지 그려 넣었다. <환상> 교향곡으로 유명한 베를리오즈도 권총을 들고 바리케이드를 누볐고 왕당파에 속했던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유주의로 기울게 된다.


7월 혁명은 나폴레옹 몰락 후 프랑스에 다시 돌아온 부르봉 왕조의 왕 샤를 10세의 시대착오적인 반동 정치에 반발한 시민들의 봉기였다. 혁명 와중에 단두대에 올랐던 루이 16세와 나폴레옹 이후 다시 프랑스 왕좌에 앉은 루이 18세의 동생이었던 샤를 10세는 매우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프랑스 국왕에게는 병자 치유의 능력이 주어진다는 중세의 속설을 따라 그 대관식에서 피부병 환자를 치유하는 쇼를 벌일 정도였으니 능히 그 심리 상태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루이 18세가 혁명의 결과들을 어느 정도 인정하려 했다면 샤를 10세는 그 모든 것을 무위로 돌리려 했다. 혁명 이전 귀족들의 특권을 회복시키고 언론 활동을 막고, 결정적으로 시민들의 참정권, 즉 선거권에 재갈을 채우려 들었던 것이다. “나의 임무는 혁명과 나폴레옹이 남긴 먼지를 남김없이 쓸어버리고 옛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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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10세 / 출처 : 위키피디아>

 


샤를 10세의 반동 정치는 당시 유럽 보수 체제의 핵심이라 할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마저 “이건 아니다.”라고 우려를 제기할 수준이었다. 그 정점은 반동 정치인 가운데에서도 가장 극단적이었던 폴리냑을 수상으로 인정한 일일 것이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한탄 속에 프랑스 자유주의 세력은 바야흐로 하나로 단결한다. “국민이 원하지 않는 군주는 동일한 왕가의 다른 사람으로 교체시킬 수도 있다. 영국의 명예혁명이 그러했다.” (야당지 르 나시오날)


1830년 3월, 의회가 열렸다. 1827년 총선에서 자유주의파가 승리했기에 의회와 정부는 사사건건 맞서고 있었고 무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국왕의 공공연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내각 불신임을 결의했다. 이 결의는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과연 국왕은 이 결의에 따를 것인가 아니면 의회를 무시하고 자신의 의사를 관철할 것인가. 왕권신수설을 굳게 믿고 “영국 왕 같은 입헌군주가 되느니 장작이나 패고 살겠다.”라는 삿된 소리를 서슴지 않던 샤를 10세는 당연히 후자를 택했다. “의회를 해산하라. 재선거를 실시하여 새로운 의회를 구성하겠노라. 폴리냑 내각은 계속 일을 보라. 언론 규제를 강화, 실시하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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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10세의 대관식 / 출처 : 위키피디아>

 


혁명을 경험했으며 왕의 목이 단두대 위에서 굴러떨어지는 것을 본 일이 있는 프랑스 국민의 속내는 부글부글 끓었다. 그 열기는 1830년 7월 5일부터 실시된 선거에 그대로 반영된다. 일정 정도의 세금을 내는 이들에게만 부여된 투표권이었고 (<레미제라블>에서 매춘부 팡틴을 희롱하던 신사를 두고 경감 자베르가 ‘세금을 내고 투표권이 있는 신사’라고 두호하던 풍경을 기억해 보자) 왕당파에게 극히 유리한 선거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세력은 기존 221석에서 274석으로 되레 의석을 크게 늘렸다. 이는 샤를 10세의 반동 정치에 대한 국민의 준엄한 경고이자 반대 의사 표시였다. 이 민의(民意)를 샤를 10세가 진중하게 수용했다면 프랑스의 역사는 또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샤를 10세는 기어코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고 만다. 국민의 뜻이 오롯이 담긴 선거 결과를 무시했던 것이다.


7월 26일 샤를 10세는 다음과 같은 칙령으로 국민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다. “최근의 선거에 의해 소집될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해산한다. 새 선거법을 제정하며 그 선거법에 의하여 선거를 다시 실시할 것이며 언론 규제를 더 강화하겠다.”라는 실로 어리석기까지 한 칙령이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권력자, 국민의 뜻보다 자신의 권력에 더 민감한 권력자만큼 아둔한 존재도 없다. 그들은 자신이 쌓아둔 성채 위에서 자신의 눈에 맞춘 안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유리하게 편집된 정보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샤를 10세가 그랬다. 선거를 통째로 무시하는 칙령을 내리면서도 샤를 10세는 이 조치에 필요한 무력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병력의 태반이 지중해 건너 알제리에서 작전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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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histoire-fr.com/ >

 


시민들은 곳곳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정부군과 충돌했다. 미국의 독립전쟁에서 대활약하여 워싱턴으로부터 “친구이자 아버지”라는 말까지 들었고, 프랑스 혁명사에서 그 의미가 지대한 ‘테니스 코트의 선서’(헌법 수립 전까지는 결코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3부회 평민 계급 의원들의 맹세)의 주역이었던 ‘두 대륙의 영웅’ 라파예트가 노구를 이끌고 나섰고 정부군의 일부 연대들도 부르봉 왕가의 흰색 깃발을 버리고 샤를 10세가 금지했던 삼색기를 치켜들었다. 7월 27일과 28일, 29일 ‘영광의 3일’ 동안 무기를 든 시민들과 왕의 군대는 격렬한 시가전을 치렀고 시민들은 왕의 군대를 물리친다. 사냥터에 있던 샤를 10세가 허겁지겁 사자를 보내 문제가 됐던 선거권 제한 등의 칙령을 철회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지만, 이미 의회는 샤를 10세의 퇴위와 루이 필립의 ‘시민의 왕’ 등극을 결의한 상태였다. 종교 개혁 이후 신구교의 혈투 끝에 왕위에 올라 프랑스의 안정을 가져온 앙리 4세 이후 수백 년간 프랑스를 지배해 온 부르봉 왕조는 이것으로 끝났다. 


7월 혁명을 유발한 핵심적 요소 중 하나는 바로 샤를 10세의 선거권 축소였다. 1830년 당시 인구 약 2천만 명의 프랑스에서 선거권자는 겨우 10만 명 남짓이었다. 비슷한 시기 인구는 프랑스보다 조금 적었던 영국의 투표권자가 80만 명으로 증가해 있었던 점에 비추어보아도 프랑스 국민의 선거권은 극히 제한돼 있었다. 또 이 힘겨운 선거를 통해 당선된 의회마저 소집되기도 전에 해산을 선언하니 국민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7월 혁명을 통해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립조차 1848년 점증하는 참정권 확대 요구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다가 결국 또 한 번의 혁명(2월 혁명)에 직면하여 왕좌를 비우고 망명길로 떠나야 했다. 신분과 재산에 관계없이, 일정 연령에 다다른 보통 사람들이 보통 선거권을 행사하기 위해서 흘려야 할 피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투표소에서 내리찍는 동그랗고 붉은 기표 마크를 보면서 나는 가끔 그 피들을 상상한다. 투표권을 더 많은 사람에게 부여하라며 부르짖다가 죽어간 사람들의 피는 역사 속에서 강물처럼 흘렀다.

 

 

필진 : 김형민 PD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 전공인 국사와 세계사를 틈틈히 공부해 SNS와 블로그에 '산하의 오역'이란 제목으로 역사관련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렇게 모은 글을 엮어 '그들이 살았던 오늘'의 제목으로 책을 냈다. 현재 sbscnbc에서 PD로 활동 중이다

*위 내용은 외부 필진의 개인적 의견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정당당스토리 


 

 

첨부파일 : franc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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