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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선거역사

작성자 : 슈퍼관리자 등록일 : 2015-09-21

 

 생명력을 잃은 1984년 8월 22일의 남아공 선거

 

<파워 오브 원>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살던 영국인 소년이 흑인들과 교감을 나누며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게 되고, 그들을 위한 투쟁에 힘 하나를 보태겠다고 다짐하던 내용의 영화다. 흑인 배우의 대명사가 되다시피 한 모건 프리먼이 소년에게 영감을 주는 흑인으로 등장했던 이 영화에서 영국인 소년이 남아공의 백인 소년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 백인 소년들은 끝내 영국에 정복당하긴 했으나 두 번에 걸친 보어 전쟁으로 세계 최강 대영제국의 군대를 단단히 골탕먹였던 보어인들이었다. 네덜란드 이민의 후예인 보어인들은 1910년 자치권을 획득했으며 자치권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보존해 나가게 되는데 이들을 주축으로 한 정당이 바로 남아공 국민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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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워 오브 원' / 출처 : Warner Bros>

 


영화 <파워 오브 원>에서 보듯 보어인들은 철저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이었고, 국민당은 틈날 때마다 인종차별적 정책을 양산해 냈다. 인종 문제에 조금은 온정적이었던 영국계가 중심이 된 연합당과 양당제가 형성되어 연합당이 세력을 유지했을 때에는 노골적인 인종차별이 감행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1948년 총선에서 국민당이 승리를 거둔 뒤 유색인종의 투표권을 박탈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남아공은 본격적인 인종 분리, 즉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 후 남아공의 역사는 말 그대로 페이지마다 피비린내 그득하고, 장을 넘길 때마다 거친 비명과 욕설 소리가 넘쳐난다. 역사에 굵은 핏방울로 남은 학살 사건만 해도 열 손가락을 넘기지만 그중에서도 1960년 샤프빌 학살과 1976년 소웨토 학살은 참혹함이 절정을 이룬다.

 
1960년 흑인 지도자 망갈리소 소부크웨는 흑인의 거주와 통행 자유를 제한한 통행법에 반대하자고 호소한다. 정부가 흑인은 항상 소지하고 다니라고 한 통행증명서를 반납하자는 것이었다. 폭동이라기보다는 항의 시위 정도의 행진. 그런데 군중 쪽에서 돌이 날아들었고(경찰 측 주장), 엉겁결에 경찰이 총을 쏘면서 학살이 시작됐다. 엉겁결에 시작된 사격은 달아나는 군중의 등을 향해 2분 동안이나 계속됐고 결국 69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이 만행에 영국 정부가 격노하여 남아공 정부에 항의하자 남아공 정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영연방을 탈퇴해 버린다. 이때 남아공 총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화강암처럼 버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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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명의 흑인들이 죽음을 당한 샤프빌 학살의 참상을 그린 그림>

 


인간에 대한 인간의 혐오로 똘똘 뭉친 인종주의의 화강암은 더욱 단단하고 굳어져 갔다. 흑인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살되 그 나라의 국민이 아니었고 어떠한 정치적 권리도 인정받지 못했으며 기본적인 자유조차 박탈당했다. 심지어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까지도 모욕받아야 했다. 1976년 남아공 정부는 흑인 학교에서 자신들의 언어인 아프리칸스어를 의무적으로 가르칠 것을 명령했다. “이 언어를 아는 것이 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전국의 흑인들이 들끓는 가운데 소웨토라는 도시의 흑인 학생들은 항의 시위를 했는데 이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하면서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수백 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빚어지고 말았다. 이 사태는 흑인 사회를 격동시켰다. 심지어 백인 시민들까지 정부의 잔인한 진압에 거세게 항의하고 나섰고 소요는 남아공 전역으로 확대됐다. <백색의 계절(A Dry White Season, 1989)>, <자유의 절규(Cry Freedom, 1987)> 등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과 그에 맞선 투쟁을 그린 영화는 대개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남아공 정부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아니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소웨토 사태를 겪은 뒤 새로 대통령이 된 보타는 "인종차별은 영구적인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 모두 죽을 수도 있다."라고 말하며 변화를 모색하는듯했지만 그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는 허울 좋은 선거가 1984년 8월 22일 실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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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르트헤이트 선거에 투표하지 말라는 포스터>

 


1983년 남아공 정부와 의회는 백인 일색이던 의회의 문호를 열어 유색인종(혼혈 등)과 인도인의 3원제 의회를 구성할 것을 결의했지만 여기에는 인구의 74%를 차지하는 흑인이 배제돼 있었다. 즉 인도인 등을 정치권에 끌어들이면서 흑인의 저항을 약화시켜 보려는 꼼수였고, 대외적으로 남아공이 변하고 있음을 과시하려는 술수에 불과한 선거였다. 남아공 내 흑인과 아파르트헤이트를 반대하는 단체들은 당연히 이에 격렬히 항의하고 나섰다.

 
3원제 의회가 선포되기는 했으나 백인 의석이 178석인데 비해 유색인 의회는 80석, 인도인 의회는 49석으로 구성된 기형적인 의회 구조였다. 일부 양보는 하되 백인 지배 체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다는 의지가 분명했던 선거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색인의 64.8%가 유권자 등록을 했지만, 그 가운데 29.5%만이 투표를 했고 전체 유권자로 보면 19%의 저조한 투표율을 보였다(1984년 8월 29일 자 경향신문). 유색인종이 주로 거주한 케이프 페닌술러의 경우 투표율이 4%에도 미치지 못했고 최고 투표율이 불과 48%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흑인의 저항은 점차 격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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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르 빌렘 보타>

 


이 3원제 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 피터르 빌렘 보타였다. 개헌을 통해 실권을 가진 대통령으로 선출된 그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고수하며 흑인의 소요를 잔인하게 진압했지만 이미 스스로의 권리에 눈 뜬 흑인과 국제 사회의 차가운 시선은 그의 정부를 점차 고립시켰다. 그해 말 흑인으로서 인권 운동을 앞장서 펼친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은 그 절정에 해당했다. 투투는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이렇게 절규했다. “이 상은 보금자리를 산산이 파괴당한 채 수용소에서 비에 젖은 매트에 앉아 우는 아이를 달래며 지은 죄라고는 남편과 함께 살고 싶어하는 어머니들의 것입니다. 이 상은 마치 쓰레기처럼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이 땅의 350만 흑인을 위한 것입니다. 이 상은 우리들을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인정해준 것입니다.”

 


남아공 정부는 수차례나 투투의 여권을 압수하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압박을 다 했고 국제적 경제 봉쇄를 부른 투투 주교의 언동을 두고 매국노라 부르며 언성을 높였지만 그뿐이었다. 일부 유색인종과 아시아인으로 구성된 의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민의의 정당한 표출이라 할 선거는 그만큼의 권위와 힘을 지니지만 지배 권력의 이익과 구미에 영합하기 위한 선거는 결국 그 생명력을 삽시간에 잃는다. 1984년 8월 22일의 남아공 선거는 이를 여실히 입증한 선거였다. 이로부터 10년 후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다인종 자유선거로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필진 : 김형민 PD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 전공인 국사와 세계사를 틈틈히 공부해 SNS와 블로그에 '산하의 오역'이란 제목으로 역사관련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렇게 모은 글을 엮어 '그들이 살았던 오늘'의 제목으로 책을 냈다. 현재 sbscnbc에서 PD로 활동 중이다

*위 내용은 외부 필진의 개인적 의견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정당당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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