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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선거역사

작성자 : 슈퍼관리자 등록일 : 2015-09-08

아일랜드의 메리 로빈슨, 그녀가 이뤄낸 기적 같은 변화

 

유럽 각국 가운데 한국과 비슷한 역사적 감정에 사로잡힐만한 나라가 있다면 단연 아일랜드다. 아일랜드는 12세기 잉글랜드의 헨리 2세의 침략을 받은 이래 근 800년간 잉글랜드의 지배하에 있었다. 중세 말 이후 잉글랜드의 영향력이 축소되는가 했지만 파란 많은 잉글랜드 왕 헨리 8세의 전면적인 침략을 받고 필설로 형언하기 힘든 박해를 받는다. 5세기에 일찌감치 가톨릭을 받아들여 가톨릭 신자 비율이 인구의 85%였지만 잉글랜드 지배하의 아일랜드 의회에는 가톨릭교도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은 그 차별의 단면을 여실히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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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대기근을 묘사한 그림 / 출처 : http://history105.libraries.wsu.edu>

 


아일랜드 역사에서 최악의 시기라면 역시 19세기 중엽의 ‘아일랜드 대기근’을 빼놓고 말할 수 없디. 아일랜드 땅을 차지한 잉글랜드 지주들은 곡식을 있는 대로 긁어 잉글랜드로 빼돌렸고 아일랜드인들은 감자를 주식으로 삼아야 했다. 애초에 대기근의 원인은 잉글랜드의 착취에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일랜드인들이 주식으로 삼아 버티던 감자에 전염병이 돌면서 글자 그대로의 파국이 왔다. 100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고, 100만 명 이상이 아일랜드를 떠났다. 이때 필사적으로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 건너간 이들의 후예가 미국의 케네디와 레이건 대통령이다. 아일랜드 본토의 인구보다 국외의 아일랜드계 인구가 몇 곱절이 되는 것은 이토록 슬픈 역사에서 기인한다.


치열한 투쟁 끝에 아일랜드는 독립을 쟁취하지만 그 미래란 그렇게 장밋빛이 못되었다. 수백 년 아일랜드를 짓밟았던 영국과는 계속 긴장의 연속이었으며, 영국 일부로 남은 북아일랜드 문제는 영국에도 골칫거리였지만 아일랜드에도 불안의 씨앗이었다. 또 만성적인 경제난과 노사 간의 갈등은 아일랜드를 유럽의 문제아로 낙인 찍었고, 국교이다시피 했던 가톨릭의 보수적 분위기는 전 사회를 짓눌렀다. 1980년대 후반쯤에는 실업률이 17%를 기록, 19세기 중반의 아일랜드 대기근 때와 같이 수많은 아일랜드인이 고국을 등지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즈음 아일랜드에 혜성과 같이 등장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메리 로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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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로빈슨(Mary Robinson) / 출처 : http://eu2013.ie>

 


아일랜드의 정치 체제는 내각 책임제다. 그래서 대통령은 실권이 없으나 국민의 직접 선거로 선출되며 상징적 존재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한다. 1990년 11월 9일 메리 로빈슨은 아일랜드의 첫 여성 대통령에 당선된다. 부수상 겸 국방부 장관이었던 브라이언 레니한을 8만 표 차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그녀가 내지른 함성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그녀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우리 이렇게 살지 맙시다.”

 

이혼은커녕 피임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보수적인 가톨릭의 나라에 태어난 여성으로서 로빈슨은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는 상식이 돼 버린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애써 온 사람이었다. 가톨릭 교회가 가톨릭 교도의 입학을 금하다시피 했던 트리니티대학교에 입학하여 가톨릭 교인으로서는 최초의 학위를 받은 정도는 그녀의 지난한 투쟁의 첫발에 지나지 않았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교도인 남편 니콜라스 로빈슨을 선택한 그녀는 미국 유학 후 나이 스물다섯에 상원의원이 된다. 그녀는 정말로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1970년 상원에 피임을 합법화하는 법안을 제출했고 이 법안 통과를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며 1976년에는 이혼의 합법화를 제안한다. (가톨릭의 지배가 얼마나 촘촘했는지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혼도 피임도 아일랜드에서는 합법이 아니었다) 그녀와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의 노력으로 피임은 1979년 정식 혼인한 부부에 한해 허용됐으며 1985년에는 18세 이상이면 누구에게나 허용됐다. 그녀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이런 노력을 알아본 여성들의 힘이었다. 보수적인 아일랜드 분위기에서 남편의 뜻을 따라 투표권을 행사하던 아일랜드 여성들이 대거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아일랜드에서 메리 로빈슨의 당선은 이변 중의 이변이었다. 아일랜드의 보수적인 신사들은 선거 결과가 나왔을 때도 그것을 믿지 못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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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로빈슨(Mary Robinson) / 출처 : http://www.un.org>

 


상징적 대통령이라지만 그녀의 역할은 지대했다. 남녀평등과 여권신장을 위해 헌신했으나 대통령 선거 출마 이전 남편과 세 아이의 지지가 무엇보다 중요했던 아일랜드 주부이기도 했던 그녀는 대통령 취임사 속에서 여성의 리더십이 어떤 것인지를 미리 드러내 보였다. 그녀는 아일랜드 출신 시인이었던 예이츠의 시구를 인용하며 이렇게 연설한다. “나는 아일랜드인입니다. 오세요, 저와 함께 아일랜드에서 춤을 춥시다. (I am of Ireland. 'Come... dance with me in Ireland')” 그리고 집무실 창문에 등불을 걸었다. 이름하여 이민자의 등불. 수백 년 고달픈 역사 속에 조국을 떠나야 했던 수많은 아일랜드인과 그 후예들에게 조국의 빛을 밝히고자 하는 뜻이 담긴 등불이었다. 전 세계에 흩어진 ‘Irish' 즉 아일랜드인에게 비친 고향의 등대였다. 대통령 집무실 창문을 밝힌 이 가스 등불에 전 세계의 아일랜드인이 호응했다. “아일랜드에서 그녀와 함께 춤춰 보자.”


투자가 쏟아졌고 아일랜드 국민도 “우리도 한번 바꿔 보자.”는 마음으로 단결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수백 년 포한이 맺힌 영국과의 관계도 개선됐고 유럽의 지진아라 불린 아일랜드는 폭풍 성장을 거듭했다. 국민 소득은 3만 달러를 넘어섰고, 평균 경제성장률은 9.9%를, 소비지수는 유럽연합 대비 90%를 기록했다. 메리 로빈슨이라는 여성 대통령이 재임한 7년 동안 일어난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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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suf Batil' 난민 캠프의 메리 로빈슨(Mary Robinson) / 출처 : http://theelders.org>

 


그녀가 7년의 임기를 마칠 당시 그녀의 지지율은 무려 93%. 국민들 사이에서는 메리 로빈슨을 종신 대통령으로 삼자는 움직임까지 일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마다하고 인권운동가로 돌아간다. "진정한 리더십은 나만이 아니라 남을 돌아볼 줄 아는 것이자 모두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게 그녀의 말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주류가 아니라 주류의 밖에서 싸워 온 사람임을 자처했다. 정체된 사회에 머물지 않고 억압받는 권리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던 아일랜드의 한 비주류 여성 변호사는 자신뿐 아니라 아일랜드를 변화시켰고, 인권 운동가로서 세계를 변화시켰다. 그녀가 이뤄낸 것은 기적 그 자체였다.

 

 

필진 : 김형민 PD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 전공인 국사와 세계사를 틈틈히 공부해 SNS와 블로그에 '산하의 오역'이란 제목으로 역사관련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렇게 모은 글을 엮어 '그들이 살았던 오늘'의 제목으로 책을 냈다. 현재 sbscnbc에서 PD로 활동 중이다

*위 내용은 외부 필진의 개인적 의견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정당당스토리 


첨부파일 : Mary Robinso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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